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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Ceremony

아마 여러 귀족 아가씨들께서 공통적으로 많이들 가지고 계시는 취미라면 역시 티타임이 아닐까. 책 속에서 다들 능숙하게 차를 따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현실에서도 그러니까, 동화책 속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 거겠지.
에스티엔느는 읽고 있던 동화책을 푹 덮으며 생각했다. 종이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 조금 손이 간지러웠다.
표지가 깔끔한 동화책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서점의 것이다. 에스티는 서점을 참 좋아했다. 돈을 내지 않고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지금 와서야, 돈을 내기도 좀 그렇다. 서점 주인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다. 에스티는 잘 읽었어요, 하는 뜻으로 가지고 있던 사탕을 하나 올려놓았다.
서점엔 이제 볼 일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동화책을 하나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보는 눈이 없다고 절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런 교육을 받은 적 없다.

에스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점을 나섰다.



Ceremony
To. 유리님




"으응?"

마악, 근처 카페를 지나던 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점 같이 시간이 멈춰서 먼지가 조금 내려앉기 시작하는 그런,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카페다.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카페 앞 작은 의자에 앉혀져 있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카페의 모든 시간은 멈춰있어야 했다. 하지만 팔락이는 햇빛가리개 아래에 누군가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느 누군가의 시간만은 멈추지 않은 것 같다. 에스티 그녀 자신처럼.

"안녕하세요, 언니?"

적어도 이 대륙에서 시간이 멈춘 자는 특별했다. 에스티는 조금이라도 더 특별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었던 탓에 차를 즐기고 있는 우아한 여성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이미 인기척에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비취빛 눈동자의 에리시아 아델라이데는 에스티의 인사를 받고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다짜고짜 자기소개하면 조금 우습나요? 저는 에스티엔느 테오도라 리히터예요. 언니는요?"
"이름이 참 기네요? 에리시아 버밀리엘 아델라이데예요."
"언니도 이름이 기네요!"

자기처럼 이름이 그렇게 긴 다른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면서 에스티가 까르르 웃었다. 에리시아는 맞은편의 비어있는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이것도 우연인데, 앉아요. 같이 차라도 마시는 게 어때요?"

에스티는 그녀의 제안을 쾌히 승낙하고 모자를 벗어 빈 의자 끝에 걸고 자리에 앉아 물었다.

"좋아요, 좋아요. 무슨 차예요?"
"'세레모니'라는 이름의 홍차예요."
"세레모니, 세레모니. 뭘 축하해요?"
"글쎄요. 에스티엔느 양과 저의 우연한 만남?"

다구를 가지고 나온 걸까. 에스티는 에리시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티포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모양인지 에리시아가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이거요? 잠깐 빌렸어요."
"누구에게요?"
"카페 주인이요."
"안 움직이시는데요?"
"암묵적으로 빌린 거죠, 나중에 돌려드릴 거예요."
"으응."

에리시아는 여분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찻물이 그윽한 향을 내며 흰 잔 속을 찰랑찰랑 채워갔다. 에스티는 한두 번 따라본 솜씨가 아닌 것 같은 에리시아의 동작을 보며 신기해했다.

"차 많이 따라보셨나봐요. 하나도 안 흘리세요! 에리시아 언니는 대단한 것 같아요."
"과찬이세요."
"전 매일 흘리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흘린 차는 닦아주곤 했어요."
"그러시구나. 많이 하다보면 늘어요. 요령도 생기고요."

잔을 적당히 채운 에리시아는 찻잔을 에스티의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던 티푸드 접시도 손끝으로 살그머니 밀어주었다. 갑자기 받은 많은 호의에 에스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세요."
"고, 고맙습니다!"
"이 정도로 뭘요."

에리시아는 귀 뒤로 그녀의 탐스러운 은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에스티는 그녀의 웃음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쿠키를 하나 집어먹었다. 버터향이 은은하게 입안에 맴돌았다. 세레모니가 담긴 잔을 들고 입에 데지 않게 살짝 마시자 또 그것이 별미였다.

"맛있어요!"
"그렇죠?"
"엄마는 늘 빵 같은 걸 먹을 땐 밀크티를 줬어요. 그것도 차긴 하지만, 음, 뭔가 우유가 들어갔으니까 진짜 이런 차는 처음 먹는달까."
"이제부터 마셔보면 되죠, 기회는 많잖아요."

그렇죠, 그렇죠. 에스티는 웃으며 치즈케익을 포크로 조금 찍어먹었다. 에리시아는 미소를 조금도 변치 않은 채 그녀 몫의 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새 방이 생겼지. 치즈케익을 우물거리며 에스티는 방을 어떻게 꾸밀까, 생각했다.
거기다가 차를 놔둘 수 있을까? 바다를 항해하게 될 텐데 거기에 있으면 조금 뭐랄까, 눅눅해지지 않을까. 바다 냄새가 배이진 않을까. 잘 보관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선반에 얹어놓으면 이쁠지도 모르는데.

결국 차를 조금이라도 구매해보기로 마음 먹은 에스티는 에리시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언니, 차는 어디서 사요?"

꽤 당혹스러운 질문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에리시아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찻잎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원하는 대답을 정확히 얻지는 못했지만 에스티는 그것대로 만족했다. 에스티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모자를 집어 다시 잘 쓰며 말했다.

"실례지만, 먼저 일어날게요! 해가 저물기 전에 찻잎가게를 찾아보려구요. 다음에 또 언니랑 만날 수 있었음 좋겠어요."
"벌써 가시게요? 꼭 찾길 바라요."

톡톡, 구두를 땅에 부딪히는 잠깐의 손님, 에스티를 보며 에리시아는 얇고 아름다운 손을 들어서 살짝 흔들어주었다.

"세레모니 맛있었어요!"

그렇게 외치고 멀어지는 에스티의 뒷모습을 보던 에리시아는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 그것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에리시아의 잔 안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옅은 갈색의 차 표면에 그녀의 눈동자가 비치던 것이 잠깐 사라졌다.

날씨가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