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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폭풍의 언덕
"...선생님. 저, 오늘, 선생님 방에서... 자도 되나요?"

  그건 제법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휴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거실의 가구들을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춤과 동침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내느라 잠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곧 그는 그게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걸 깨닫고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무서, 워서요."

  휴는 그제야 지젤과 함께 폭풍의 언덕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녀는 책을 읽으며, 폭풍우 치는 밤에 캐서린의 이름을 울부짖던 히스클리프를 두려워 했었다는 것 또한. 휴는 그녀가 왜 히스클리프를 두려워하는진 알지 못하였으나 그 이유를 모른다 하여 몸을 작게 떨고 있는 지젤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휴는 아직 온몸으로 어른이 되기보다는 쭉 소녀이기를 원하고 있는 듯한 작은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고 침대 한 켠을 비워놓겠다고 대답했다. 지젤이 볼이 살짝 붉어지는 듯도 했다.

  "...Grazie."
  "In English."
  "...Thank you, Sir."
  
  휴 맥거원은 늘 그렇듯이, 소녀의 토슈즈 소리가 잦아든 10시를 조금 넘겨서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 위스키는 나름대로 푹 잠들기 위한 방책 중 하나였으나 오늘만큼은 위스키의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휴가 새벽녘에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땐, 멀리서 때 늦은 태풍이 휘몰아치는 듯 서슬 퍼런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빗소리는 멀었다. 하지만 태풍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휴에게 있어서 태풍보다 더 놀라운 건 제 옆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단지 머리를 어깨에 기댄 채로 웅크렸을 뿐이지만, 휴는 옆 켠을 내주기로만 했을 따름이었지 그녀가 이렇게 가까이 붙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던 탓에 이 상황을 뭐라고 생각해야할지 몰랐다. 그러던 찰나, -제. 바람소리 사이로 작고 희미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는 잠꼬대를 웅얼거린 소녀를 보았다. ...죠제. 지젤은 잠든 채 울고 있었다. 휴는 지젤이 읊조린 이름을 되새겨 보았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아마 휴로서는 평생 모를 이름일 터였다. 그는 스스로가 그 이름에 대해 알려들려고도 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휴는 방금 들은 이름을 애써 모른 척 하고, 지젤의 어깨까지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려 주었다. 그러자 결코 어여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울퉁불퉁한 발가락이 달린 흰 발이 이불 아래에서 모습을 내밀었다. 휴는 그 작은 발을 바라보다가, 밤공기에 시리지 않도록 그는 이불을 아래로 조금 당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꼬대도, 눈물도, 자신이 외면해준다면 밤이 지난 뒤에는 다 사라질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