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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The Magic Pocket


라임이 제국 내의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있었던 것은 결코 시간 속에 갇힌 거리를 낭만적으로 혹은 열정적으로 감상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지금의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미쳐 내린 결정이었을 뿐이다. 간간히 바람소리와 더불어, 시간이 멈추지 않은 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비비는 소리가 라임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라임은 잠깐 멈춰서서 고개를 틀었다. 딱히 깊은 의미를 둔 행동은 아니었다. 멈춘 그의 귓가에 다가오는 소리는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바람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그리고 자신의 발소리.

하지만 곧 다른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싶어 라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소리와 마주했다 싶었더니,

"엄마야!"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배에 둔탁한 타격이 느껴졌다. 잠깐이기는 했지만, 그건 꽤나 아팠다. 달려온 사람의 머리가 배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라임은 손바닥으로 배를 눌렀다.

"어억."

그리고 자연스러운 반동으로 고개를 숙인 라임은 곧 제 앞에서 군청색 정수리를 볼 수 있었다. 선글라스 안쪽의 회색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조금 일그러졌다가 곧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자세히 눈여겨보자 그것은 모자의 색이라는 걸 알았다.
모자가 갑자기 움직였다.

"아, 오빠. 미안해요."

모자 아래에서 나타난 얼굴이 미안한 표정을 한 채 라임에게 진지하게 사과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서 진지함이 조금 줄어든 것 같긴 하지만.

"아,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지만 그녀, 에스티엔느의 가방은 괜찮지 않았다.
아마도 라임과 에스티엔느가 부딪힐 때, 그 핸드백은 그녀의 손에서 떠나 날아가, 그 뒤 그 속에 들어있던 모든 내용물을 쏟아놓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도 쏟아놓는 중이었고, 방금 전 멈췄다. 그리고 라임은 간단하게 말했다.

"……네 가방은 안 다행인 것 같은데?"
"네?"

라임은 그녀의 가방이 쏟아놓은 잔해들을 보았다. 분명 가방은 A4 사이즈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쏟아져 나온 것은 꽤 많아, 아연해졌다.
에스티엔느가 지르는 비명 속에서, 그 와중에도 라임은 내용물을 슬쩍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형 두 개, 만들다만 인형옷들, 립글로스, 지갑, 솜뭉치들, 반짇고리, 실뭉치, 거울, 간식거리, 파우치, 실핀들, 수첩, 펜, 조금 낡은 주머니, 로사리오, 동전지갑, 브로치…….

눈에 지금 집히는 것만 해도 열 개는 족히 넘어보이는데, 공교롭게도 라임은 그 물건들을 셀 때 발가락까지 합치더라도 모자랄 것을 알았다.
에스티엔느가 허겁지겁 주워담는 것을 보던 라임은 흔들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동화책이나 펼치고 독서나 할 것 같은 이 소녀의 가방에서 나온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에 입을 쩍 벌릴 뻔했다.

그래, 저 립글로스나 반짇고리는 여자아이다우니까 넘어가고. 간식거리? 뭐 가방 안에 넣어둘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저, 드라이버 세트랑 뭐가 들었는지 모를 낡은 주머니, 미니 망치, 미니 못…… 이상한 부적…… 잠깐, 지금 내 발 밑에 있는 이건 설마 자물쇠 따개 세트?

"……."
"아, 실 다 풀렸네! 언제 다 말고 있지…… 거울…… 거울, 아, 안 깨졌다. 다행이다."

혼잣말을 내두르며 에스티엔느가 하나하나 제 물건을 주워담는 것을 보던 라임은 도와줄까,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이 아이가 부딪혀서 넘어진 대상은 자신이니까, 자신에게도 조금 책임이 있다고 느껴졌던 탓이다. 하지만 선뜻 손이 내밀어지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그가 그렇게 살아왔던 탓이리라. 그래서 에스티엔느가 물건을 이것저것 주워담아 가방에 넣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소녀가 고개를 들어 라임을 향해 급히 손짓했다.

"오빠, 오빠, 오빠, 거기 오빠 발 밑에…… 그, 도구 좀 주워 주실래요!"

이미 라임으로서는 그 도구가 뭔지 파악이 끝난 상태였으나 에스티엔느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자물쇠 따개 세트라고 말을 못 했고, 또한 라임이 그 도구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잠깐 뜸을 들였다.
내가 사실 이 도구를 아노라고 진실을 말할까 잠깐 고민하던 라임은 고개를 살짝 저은 뒤 그저 조용히 '도구'를 집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아휴, 거의 다 주웠다. 괜찮으시면 좀 도와주세요, 오빠!"

라임은 방긋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부탁을 받았으니까, 도와줘볼까. 라임의 머릿 속에서 잠깐 망설임이 고공비행했다.
결국 라임은 근처에 있던 미니 망치와 수첩 그리고 실핀들을 하나하나 주워 그녀에게 건네어주었다.

"아, 정말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괜찮아."

용건이 다 끝났겠거니, 하며 라임은 일어났다. 하지만 치맛자락을 툭툭 털던 소녀의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차암, 오빠. 그런데 혹시 오빠도 배 탈 거예요?"
"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라임은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물론 에스티엔느는 그가 끼고 있는 선글라스 때문에 라임의 표정이 어떤지 잘 알 순 없겠지만 말이다.

"아니~ 오빠도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뜬금없죠? 알아요. 헤헤."
"아직은 몰라."
"저는 에스티엔느 테오도라 리히터예요! 간단하게 에스티라 부르셔도 되구요, 도라라고 하셔도 되구요~ 오빠는?"
"라임."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귀찮았다고 해두자고 라임은 가볍게 생각했다. 에스티엔느는 그런 라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레몬 친구 라임?"
"아니, 그냥 라임."
"알아요, 농담이예요.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그러면서 에스티엔느는 라임의 뒤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머릿속에 있던 계획 목록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임은 별 의미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