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생물은, 정말 안이한 존재다.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불행하게도 에스티엔느도 그러했다. 그녀는 가방을 늘 들고 다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일을 조심해야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안이했다.
자신의 물건을 누가 훔쳐가지는 않을 거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 덕분에 그녀는 등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커다란 각설탕캐릭터 같이 생긴 자신의 네모 가방에서 뭔가가 없어졌다는 걸 그 때까지 몰랐다.
그 때가 언제냐면, 사람들이 조각상처럼 여기저기서 굳어버린 광장에서 홀로 움직이는 남자를 발견했을 때를 말한다.
에스티엔느가 그 광장에 다다랐을 때, 긴 장발이 인상적인 청년이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소녀는 문득 그 광경에서 데자부를 느꼈다. 정확히는 어떤 사물에게서 데자부를 느낀 것이었다.
그게 뭐냐면, 그 청년이 들고 있는 조그만 인형 옷이었다.
에스티엔느는 갑자기 사색이 된 채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없어진 것은 그녀가 늘 갖고 다니는 엄마 인형에게 입혀주려고 꼬물꼬물 만들고 있었던 인형옷이었다.
"저기요, 오빠!"
에스티엔느는 청년의 등을 향해 달려갔다.
*
'오빠'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는데.
리 샤오, 호박색 눈이 아름다운 청년은 고개를 들어 잠깐 옆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잘못 들은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샤오는 곧 등에 가해지는 충격에 '억' 하고 소리를 냈다.
"오빠, 오빠, 오빠."
충격을 잊을 새도 없이 뒤에서 작은 손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샤오는 마치 자신이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작은 소녀에게 몸이 흔들리게 내버려두는 것은 아마 샤오 자신이, 그것을 재미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놀이기구, 공짜로 또 태워줄 거야? 재밌는데~"
한참 그렇게 흔들리던 샤오는 능청스럽게 소녀의 손에 제 손을 얹고 떼어냈다. 물론 신체의 기동성 문제로 위로 들어올리는 것이 다였지만.
샤오는 부드럽게 몸을 틀어 소녀와 마주했다.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전 하나도 안 재밌어요."
"왜? 재밌잖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배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샤오가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 있는 동안에도 소녀는 여전히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미간이 한껏 좁아진 채, 거의 주름만이 남아있었다. 샤오는 손을 들어 소녀의 미간을 꾹 눌렀다.
"얼굴 풀어~ 아가씨."
"오빠, 있잖아요. 내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빠라는 말이 좋긴 한데, 내 이름은 샤오. 리, 샤오."
미간을 꾹 누르고 있던 샤오의 손가락이 소녀의 볼을 향했다. 어쩐지 불만을 토로하는 듯한, 아니 토로함에 분명한 그녀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샤오는 일부러 과장되게 웃어보았지만, 소녀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에스티엔느 테오도라 리히터예요."
제 이름을 말할 때 아주 잠깐 입술꼬리가 올라가긴 했지만, 에스티엔느의 얼굴은 다시 돌아왔다.
"샤오 오빠."
"왜~?"
"있잖아요. 제가요."
에스티엔느는 아직도 샤오가 손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인형 옷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그 옷에 대해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내 거라고 뺏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면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옷이 찢어지지는 않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는 지금 처음 만난 오빠의 호박색 눈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구요. 그래서 오빠한테 이런 말 하기도 죄송해지는데요."
에스티엔느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낙심한 얼굴을 한 채 샤오를 보고 말했다.
"오빠가 들고 있는 그 인형옷 말인데요. 제 것 같거든요."
샤오는 입꼬리가 내려간 에스티엔느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자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스마일~ 세상 즐겁게 살자구."
"하지만 오빠가 그 옷을 들고 있는 이상은 즐겁지 않을 것 같아요."
"이름이 뭐랬더라, 에스티엔느? 괜찮아, 그 정도로 즐겁지 못하면 세상 어떻게 살려고."
에스티엔느는 조용히 손을 들어 샤오의 손가락을 하나씩 잡고 내렸다. 그녀는 정말 상심한 것처럼 보였다. 화가 난 일의 강도가 심해지면 팍 식어버린다고 해야 할까.
"그거 제 인형옷인 것 같아요, 샤오 오빠."
"으응~ 그래서?"
"제 가방 안에 있던 인형옷 말이예요."
"그리고?"
"제 가방, '안' 이요. 혹시, 저는 정말정말, 혹시나 여쭈는건데요. 오빠가…… 훔치신 건가요?"
샤오는 에스티엔느를 향해 단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호박색 눈이 아름답게 휘었다.
"아니."
"정말요?"
샤오는 싱글싱글 웃었을 뿐이다. 에스티엔느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뭔가 떠올렸는지 청년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러면 그거 돌려주실 수…… 아니, 주실 수 있으세요? 그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왜?"
"제 인형에 입히고 싶어서요!"
샤오는 고개를 기울였다. 줄까, 말까. 조금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에스티엔느로서는 샤오가 꼭 그 옷을 주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모든 것은 샤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샤오를 나쁜 청년처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옷이 찢길지도 모르니까.
"줄까?"
"네!"
"그러면~"
읏차, 하고 소리내며 샤오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에스티엔느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샤오는 씩 웃더니 손에 쥐고 있던 인형옷을 들어올렸다. 에스티엔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잡아볼래?"
"샤오 오빠, 이거 딱히 재미있어 보이진 않아요!"
"난 재미있을 것 같아!"
"……뭣. 오, 오빠."
"자, 어서 오세요. 리 샤오 옷걸이 앞에 오신 꼬마 아가씨를 환영합니다. 아가씨는 점프해서 옷걸이에 걸린 옷을 잡아주세요. 그러면 옷은 아가씨의 것!"
결국 에스티엔느는 샤오의 떠밀림에 못 이겨, 한참을 폴짝폴짝대다 샤오가 살짝 내려주어서야 겨우 옷을 잡을 수 있었다.
옷을 되찾은 에스티엔느는 가장 먼저 옷을 탈탈 털었다. 아직 다 마무리 짓지 못한 부분부분을 꼼꼼히 살핀 그녀는 샤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분히 고의적인 의도로서였다.
"아, 힘, 들, 었, 다."
인형이 말하는 것 같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하는 걸 보던 샤오는 담담히 물었다.
"재밌었지?"
"힘들었는데요, 오빠!"
"아, 그랬어? 하지만 힘들었든, 재밌었든, 그 만큼 한층 더 소중한 옷이 됐잖아."
샤오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인생을 진정 즐겁게 살아가는 자의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던 에스티엔느는 그가 이제껏 뭘 했는지도 잊고, 그저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