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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Leonhardt



제이시아는 그녀의 아름다운 은발이 바닷바람에 나부끼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보라색 부채는 제이시아의 얼굴 1/3쯤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매력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는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아직도 귓가에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소녀의 비명을 곱씹었다.

배에 태워주세요! 저를 꼭 이 배에 태워주세요.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어요.
앞으로 나아갈 방법은 이것 뿐인가요?
저를 이 배에 태워주세요, 하얀 파도와 물살이 저를 넓은 바다로 밀어내게 해주세요.
배에, 태워주세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웬 비명이 들리냐며, 잠깐 항구가 소란스러워졌었다. 물론 그 전까지도 항구는 참으로 소란스러웠지만 소녀로 인해 본래의 소란은 그것의 의미를 상실했다. 이런 비유가 맞는진 모르겠지만,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더니. 소녀가 일으킨 소동은 이제껏 일어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잠재워버렸었다.

이 소녀는 이 배에 올라탈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배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배에 태워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희생자는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짐을 나르고 있던 사람들의 소맷자락도 잡고 흔들었고, 트레스넨의 정예요원에게도 졸라댔던 모양이다.
그 중에는 청휘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넘어가고.

제이시아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그 큰 소동을 일으킨 뒤에 머리카락 정리도 차마 하지 않았던지, 결 좋은 하늘색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져 있었다. 제이시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눈치는 빠른 모양인지 소녀가 얼른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제이시아를 바로 응시했다.

"그래, 네가 이 배에 태워달라고 했다고?"

제이시아의 목소리는 안개 같이 차분했지만 소녀는 이 화려한 여인의 말에서 비수를 찾아냈다. 소녀는 반성의 의미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해요. 너무 초조했어요."
"무엇이 그렇게 초조했니."

제이시아는 이 가엾은 소녀의 카운셀링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배에 간절히 태워달라고 조르는 소녀에게는 아마 그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은 소녀는 모든 시간이 멈춘 대륙에서 움직일 수 있는, 선택받은 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저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니까요."

제이시아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기 때문에 제이시아의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시아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입술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선수를 쳤다. 소녀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든 뒤 자신의 치맛자락을 양 옆으로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보였다.

"참, 제 소개가 늦었죠. 저는 에스티엔느 테오도라 리히터예요."

뜬금없는 소녀의 자기 소개에, 제이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황당해할 법도 한 상황이지만 제이시아는 당혹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나는 네 이름을 묻지 않았는데."
"저는 제 부모님께 이렇게 배웠어요.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싶을 때엔 먼저 자기 소개를 하라. 그것이 예의다."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소녀, 에스티엔느의 눈동자는 맑은 날 하늘처럼 푸르렀다. 제이시아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난 제이시아 하른. 그럼, 네 이야기 계속 해. 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지?"

갑자기 짭짜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제이시아는 손을 들어 우아한 몸짓으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버렸다. 에스티엔느는 쓰고 있는 모자를 꾹 누르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오늘, 저는 일찍 일어났어요. 오늘은 왠지 새벽별과 일출을 보고 싶었거든요. 몰래 일어나 씻고 밖으로 나왔어요. 부모님은 자고 계셔서, 제가 나온 것을 몰랐죠. 저는 주홍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새벽별과, 분홍빛으로 물든 일출을 보고 있었어요.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저는 문득 부모님이 걱정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잠에서 깼는데 사랑하는 딸이 없으면 어느 부모님이나 슬퍼하실 거잖아요."

에스티엔느의 시선은 제이시아를 향해 있지 않았다. 제이시아는 이 소녀의 부모님이 인사 예법에 대해선 가르쳤으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에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하라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나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소녀의 눈동자에서 물기를 찾을 수 있었다.

"전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어요.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방으로 간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만든 뒤 부모님을 등 뒤에서 와락 껴안는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집에 들어가보니 조용했어요. 언제나 그 때쯤이면 일어나 계셨는데…… 부모님이 늦잠자는건진 모르겠지만 일어나 계시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계획을 변경했어요."

소녀는 구두 뒷굽으로 땅을 툭툭 쳤다. 어떤 동화책에서 마법구두를 얻은 소녀가 소원을 이루기 전에 하던 행동과 비슷했다. 에스티엔느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잠시 뒤 말을 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부모님을 깨우는 거였죠. 부모님은 제가 두 분 사이에 들어가서 누우면 반드시 일어나곤 하셨어요. 아버진 선잠을 주무셨거든요. 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에스티엔느의 복숭아 같은 볼 위로 눈물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소녀는 울지 않으려고 애쓴는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가 입을 다시 움직였다.

"안 일어나시더라고요. 분명히 숨은 쉬고 계셨는데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저는 혹시나 해서 아빠를 마구 흔들어봤어요. 그럼 일어나셔야 하는데 일어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밖으로 나왔어요. 혹시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진 않을까. 저는 옆집 이웃분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 분은, 부엌에 들어갔더니, 칼로 베이컨을 자르고 계시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계셨어요. 정말 딱, 베이컨을 자르기 직전 모습이었는데. 그런데 불 위에서 냄비는 엄청나게 끓고 있더라고요. 저는 이게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불을 껐어요. 불이 나면 곤란하잖아요."

에스티엔느는 손등을 들어 눈을 비볐다.
제이시아는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공황에 빠졌을 법한 상황이었는데도, 이 아이는 의외로 차분하게 판단을 내린 뒤 행동했던 것이 흥미로웠다.

"저는 집에 다시 돌아갔어요. 집에 혹시 불이 켜져있는 곳은 없나 샅샅이 살폈죠. 집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저는 필요한 것을 챙긴 뒤 부모님께 키스하고 밖으로 나왔어요. 우선은 뭔가를 해야 했어요. 마냥 이러고 있는다고 시간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고, 혹시 모르니까 주변의 다른 집들도 살폈죠. 결과는 올 킬(All Kill). 모두 시간이 멈춰 있었어요. 잠긴 집엔 문을 따고 들어가 불을 끈다던가 그런 식으로. 문을 어떻게 땄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주세요. 아빠가 알려주신 게 참 많아서……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전 그래서 떠돌다가 항구로 나왔어요. 집보다 바깥이 더 아수라장이더라고요. 항구에는 그나마 사람들이, 좀 많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소리가 나서…… 그래서 왔는데, 배가 있었어요."

제이시아는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걸 알고 부채를 탁 접었다. 에스티엔느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제이시아를 바라보았다. 제이시아의 태양 같은 금안이 소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죠? 저는 이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러면 부모님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도 어디선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모르는 이 앞의 어딘가로부터."

소녀의 목소리는 강했다. 자신의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제이시아는 그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녀도 그런 여자였으니까. 자신의 믿음에는 언제나 그름이 없어야만 했으니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이 배에 타는 것 뿐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전 이 배에 반드시 타야 해요. 태워주세요, 언니."

제이시아는 금방이라도 아이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에스티엔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에스티엔느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외칠 따름이었다.

"엄마는 일어나서 제 머리를 땋아주시고, 소금과 설탕을 혼동해서 넣을 뻔해서 저한테 한소리를 들으셔야 하고요, 아버지와 함께 조심해서 다니라고 절 안아주셔야 해요. 아버지는 일어나서 저를 클라인 리베라고 부르며 번쩍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셔야 하고, 제가 잘 구운 베이컨을 내밀면 넙죽 받아 드셔야 하고, 일을 나가셨다가 웃으며 돌아오셔야 해요."

어떻게 들으면 참으로 처절한 외침이었다.
제이시아는 에스티엔느의 애원을 닮은 외침이 제이시아 그녀와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아이는 이 모든 이야기로 자신의 동정을 사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맞아요. 그게 제가 원하는 삶이고, 제가 이제껏 누려왔던 삶이예요. 전 그걸 되찾을 권리가 있어요! 되찾기 위해서 저는 마냥 기다릴 수 없어요, 시간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기보다는 시간을 잡으러 가야한다고요, 다시 여기에 오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에스티엔느의 볼 위로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눈만은 그렇지 못했다. 창문 위로 빗물이 미끄러지듯,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는 이 배에 타야해요. 이 배에 태워 주세요. 언니. 이 배가 저를 태우고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나아가게 해주세요. 그 앞에 희망이 지금 당장은 없어도 돼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단지 가능성만을 제게 내려주세요."

소녀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손그림자가 지나간 뒤에는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에스티엔느를, 제이시아는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디 건네었다.

"너 괜찮니."

위로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마 에스티엔느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괜찮아요."

소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Leonhardt. 제 마음은 언제나 사자처럼 굳세고, 강해요."

아버지가 늘 중얼거리시던 말이예요.
에스티엔느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이시아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주,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