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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Cafe et sucre
* 릭벨인지 뭔지 / 캐붕주의... 말투가 너무 어렵다...
* 설정 그런 거 모르겠고 쓰고 싶은 거 썼음...
* 2015년 작성




  고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귓전을 때리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하도 요란한 탓이다. 제가 곧 떠날 예정이라고 울어대는 게 뻔했다. 그러나 일곱시에 떠날 열차이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벨져 홀든은 짧게 생각했다.
  벨져는 역 내에 있는 커다란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후 6시 39분. 그는 아직 탑승 않은 채였다. 세상의 온갖 매너가 도에 넘칠 정도로 몸에 배인 그가 아직도 열차에 탑승하지 않은 이유는 저 멀리서 미적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일행 때문이었다. 벨져는 짐이 따로 없군, 하고 투덜거렸다. 마침내 겨우 벨져 앞에 당도한 릭이 서글서글 웃었다. 왼손엔 커피잔을 하나 붙든 상태였다.

  미안하오, 벨져. 기다리게 해서. 하지만 아주 늦진 않았잖소. 그러니 얼굴 좀 푸시오. 

  벨져는 혀를 찼다. 공간이동자가 커피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게 퍽 우스운 광경이었기도 했고, 미적댄 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영 마음에 차진 않았던 탓이다. 릭은 그런 벨져의 심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심기를 더 거스르지 않고 제 탑승권이나 찾았다. 아, 어디 놔뒀더라... 여기 있다. 한참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지던 릭은 뒷주머니에서 탑승권을 빼냈다. 보통은 안주머니에 넣지 않나. 다시 한 번 쯧, 하고 혀를 차는 건 여전히 어이가 없기 때문이리라.
  기실 릭 톰슨은 늘 침착하고 세심한 것 같으면서도 간간히 약간 얼빠진 구석을 보이는 사내였다. 벨져가 짐작컨대 아마 회사에서의 오랜 야근으로 누적된 피로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채 떨치지 못한 피로가 남은 그의 목소리는 늘 톤이 일정한 편이었고 가끔 끝이 흐려지곤 했는데, 배에 힘을 주고 발성할 때만이 선명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우아한 기색이 묻은 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아, 또 설탕을 빼먹었군...

  이런 식으로. 벨져는 커피를 입에 댔다가 그 쓴 맛에 툭 꺾이고 만 목소리를 듣고 한심하다는 듯 코를 울렸다.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벨져는 정신 좀 차리라는 말을 했다. 릭은 사람 좋게 웃기만 하다가 오른손을 들어 시계를 보곤 중얼거렸다. 벨져는 팔짱을 꼈다. 아직 탑승할 생각이 없음이 분명했다.

  오후 6시 46분. 시간은 충분한걸.

  릭은 카페만 보면 본능적으로 들어가 트리플 샷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나오면서도, 설탕은 매번 잊어버리곤 했다. 커피를 들고 공간이동을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인지, 그는 늘 커피를 사고 걸어오는데, 그 시간 동안에도 도통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것도 버릇이리라.

  포기하고 타지.

  벨져는 결국 열차를 향해 턱짓했다. 릭은 한 쪽 눈을 찡그리곤 시계 찬 쪽의 팔을 들었다. 잠깐 기다려 달라는 의미다. 벨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벨져, 잠깐 커피 좀 들어주시겠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카페에 가서 설탕을 가져올 생각이라 말이오. 커피를 들곤 못 가니까. 당이 떨어지면 곤란해서 그러오.

  그리고 릭은 벨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벨져에게 제 커피를 떠넘기고야 말았다. 벨져는 얼결에 커피를 들고 선 셈이 되었다. 벨져는 금방 오겠소, 기다려 주시오! 하고선 공간을 연 뒤 사라진 릭의 옷 끝자락만 한참 헤아리다가 들고 있게 된 커피를 내려다 보았다. 싸구려 커피 향내가 풀풀 올라온다. 분명 이번에도 트리플 샷이리라. 향기부터가 진하고, 쓰다. 이런 커피를 대체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건지. 벨져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다. 약인걸까. 허튼 생각을 하며 벨져는 컵 뚜껑을 열고 입 가까이 잔을 가져갔다. 아주 얄팍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변덕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커피에 관심조차 주지 않을 자신이란 걸 무척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져는 끝내 쓰디 쓴 커피로 입술을 축이고야 말았다. 커피인 줄 모를 정도로, 너무 쓰다. 릭은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마신단 말인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며 컵을 내린 찰나, 벨져는 어느 샌가 눈앞에 릭이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이 다녀온 것이다. 릭은 자신의 커피에 입을 댄 벨져를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로 보다가 눈앞에 설탕스틱 다섯 개를 내보였다.

  마시고 싶었다면 진즉 말하지 그랬소, 아까 그대 것도 사올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엔 넣어서 마셔보겠소?
  시끄럽고, 준비가 다 끝났으면 가지.

  벨져는 얼굴을 찌푸리며 뚜껑 닫은 커피를 그에게 도로 돌려준 뒤 열차에 올랐다. 그의 뒤로 릭이 슬그머니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열차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차체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릭은 자리에 앉자마자 아까 돌려받았던 잔의 뚜껑을 열고 설탕을 수북히 부어넣었다. 벨져는 턱을 괴고 창가를 보다가 릭의 그런 모습을 힐끔거렸다. 릭은 그 시선을 알면서도 그저 웃었고, 곧 커피를 보란듯이 입에 댔다. 벨져는 그가 하는 양을 보다가 어느 순간 민망해지고 말아, 다시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향해 시선을 황급히 던졌다.

  커피가 참 맛있는데.

  릭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얄밉다. 그러나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풍경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릭 톰슨이, 아까 제가 입에 댔던 자리를 굳이 찾아 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