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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T4U
* 2015년 3월 작성







홀든 가의 정원에는 봄마다 계절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차가운 이슬 맺는 깊은 새벽이 지나고 불의 전차가 떠오르면 미약하게 남은 물기가 단말마처럼 수많은 꽃들의 꽃잎을 촉촉하게 적시곤 사라져갔다. 릭 톰슨은 그 순간의 정원을 가장 좋아했고, 하여 가끔씩 월담하듯 홀든의 정원으로 들어서곤 했다. 그는 어떤 경비의 눈총도 받지 않고 은밀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르고, 그 어지러운 공간 속으로 몸을 던지면 곧 자신이 너무나도 잘 기억하는 벨져 홀든의 방, 더 엄밀히는 테라스 밑에 어느샌가 도착해 있는 것이다. 벨져는 릭이 그런 식으로 홀든의 정원에 침입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경비병을 부르는 일은 이제 없었다. 처음에야 몇 번 불렀었지. 릭은 목을 울려 짧게 웃었다가 곧 소리를 죽였다.

  새벽의 정원은 여태 아름답다. 언제고 변함이 없으리라. 아마 자신이 벨져 홀든에게 품은 그 마음처럼, 무르익었으면 무르익었지 시들진 않을 것이다. 겨울의 정원은 비록 앙상해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추위를 견뎌내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힘이 있다는 걸 릭은 굉장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릭의 폐부에 새벽공기가 스며들었다. 하. 기분 좋은 한숨이 허공에 퍼진다. 그러기를 몇 번. 릭의 머리 위에서 창문이 열렸다.

  "...또인가. 릭 톰슨."

  벨져다. 질 좋은 실크로 짜여 부드럽게 찰랑이는 흰 실내복을 입은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릭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릭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일어난 거요?"
  "홀든 가 사람들은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이글 빼고."

  연인이 덧붙인 말에 릭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벨져는 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이제 겨우 다섯시 반을 넘긴 시각이다. 그럼 그, 형님도 일어나 있소? 글쎄. 아직 자고 있지 않을까. 의외의 대답이다. 방금 전 홀든 가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고 이야기 했던 건 벨져였다. 릭이 눈을 끔뻑이는 걸 보던 벨져는 못 말할 고백이라도 하듯 말을 짧게 내뱉었다.

  "...네가 늘 이 시간에 오잖나."

  '자신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이라는 말이 그 안에 분명히 생략되어 있다는 걸 눈치 빠른 릭 톰슨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릭은 잠시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있다가 환히 웃었다. 벨져는 그 얼굴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릭이 허둥지둥 팔을 흔들었다. 오른쪽에 한참 차고 있는 시계들 때문에 약간 한 팔이 버거운 듯도 했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벨져, 내가 그대의 방으로 가도 괜찮겠소?"

  그리고 그는 언젠가 발코니 아래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로미오처럼, 과장되게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뒤돌아 발코니 문 너머로 사라지려던 벨져가 그러던가, 하고 짧게 말했다. 릭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공간을 열고 뛰어올라 발코니에 발을 디뎠다. 아차. 공간을 닫기 전 릭은 빠르게 손을 게이트 안에 집어넣었다가 뺐다. 어느새 그 손에는 빨간 장미가 한 송이 들려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다 보고 있던 벨져는 가늘게 눈을 떴다. 

  "혹시 이 정원에서 꺾은 건가."
  "벨져, 장미엔 가시가 있잖소. 보시오. 지금의 난 장갑을 안 꼈다오."

  그럼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거야. 하지만 어디서 가져왔든, 벨져는 릭이 자신에게 그 장미 한 송이를 내밀며 웃고 있다는 것 자체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벨져는 짧게 한숨 쉬곤 그 장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싱글벙글 웃으며 발코니 난간에 걸터앉은 릭을 향해 속삭였다.

  "사례하지."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한 것인데? 굳이 사례하지 않아도 되오. 음, 사례하고 싶다면 커피라도 한 잔 타주시오. 사실 야근 때문에 밤을 새고 여기 온 거라..."

  또 야근. 릭 벨져에게 야근이 호흡 같은 일이라는 걸 이제 벨져도 잘 알았다. 왜 야근을 했냐는 둥 말을 더 덧붙이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여러모로 유감이군. 커피는 없어. 차로 대신해도 괜찮나."
  "음, 그대가 타준다면."
  "그렇다면 잠시 티타임을 갖지. 마침 좋은 차가 있어. 시간 때우기는 좋을 거다. ...비록 어제 구운 것이지만 스콘도 있으니 먹어도 좋다." 

  릭은 여러 이유로 신이 난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벨져가 타주는 차를 마실 생각을 한다니 아니 신날 수 없을 것이었다. 벨져는 차를 끓이기 위해 티포트와 물주전자를 찾았다. 릭은 벌써 자리에 앉아있다. 벨져는 그를 힐끗 보면서 차를 다 먹이고 나면, 좀 재울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