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포델 메르시에의 서랍 속 편지 중 하나.
시그마 R. 엡실론에게서 편지를 받은 얼마 후 작성한 답장이다.
친애하는 알레프. 오리어입니다. 편지가 올 줄은 몰라서 굉장히 놀랐어요. 편지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무사히 받았다는 의미로 답장을 해야 좋겠지만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군요. 그리하여 이 편지의 목적은 이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이 편지를 전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라는 것도, 빠른 시일 내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걸 알아요. 그러니 다만 편지를 쓴다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마 또 다른 날 전할 수 없는 편지를 쓰게 되더라도 그렇겠지요. 그 날 당신은 소리소문 없이 떠나셨더라고요. 나중에 알게 됐어요. 배웅이라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하지만 가끔씩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당신으로선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문득 듭니다. 떠나는 발길이 멈춰지지야 않겠지만 가시는 걸음이 느려지실 수는 있었을테니까요. 아무도 붙잡지 못한 그 걸음으로, 원하시던 곳엔 당도하셨나요? 보내주신 편지로 미루어 짐작컨대 조금은 당도하신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시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리시스 성자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염치 없는걸까요.) 국경지대는 많이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건강은 잘 챙기시고 계신가요? 제가 아는 당신은 제 몸을 그리 잘 보살피지는 않았으니까요. 전 그런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공국은 전쟁 이후 조금이나마 위태했던 사안들을 보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 일이 끊기지가 않아요. 흙을 밟고 식물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많이 줄었지만 라파엘라 비서장님을 생각하면 농땡이 칠 수만은 없습니다. 비서장님은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단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 후에 어느 곳이 그렇지 않겠냐만요. 공국의 국민들이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요. 당분간 이런 생활을 계속 할 듯 싶어요. 당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남은 사람들도 있지만요. 가끔은 떠나간 사람들의 빈 자리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워집니다. 그러나 이 공허함을 이겨내면 저는 좀 더 성숙해지겠죠. 사람은 힘만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저는 배신의 아픔도, 이별의 안타까움도 알았으니 아마 다시 만날 때쯤엔 당신이 알던 작은 오리어는 아니지 싶어요. 하지만 서먹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변하는 법이니까요. 당신이 다시 알레프가 된 것처럼. 나는 당신의 이름을 너무 많이도 알고 있네요. 시그마 엡실론, 로, 그리고 알레프. 당신이 알레프라 불러주길 원했으니까 알레프라고 부를게요. 하지만 알레프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안 즉시 알레프라고 불렀을 거예요. 다른 이름들보다, 알레프가 훨씬 좋은 이름인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왜냐하면 알레프라는 이름에선 밀내음이 나요. 당신의 소년시절 같은 느낌이에요. 알레프는 나와 같은 나이였을 때에도 알레프라 불렸나요? 아주 나중에라면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주 나중에, 언젠가. 알레프. 당신의 이름에 대해 적었으니 이번엔 제 아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적어볼게요. 제 아명, 오리어는 노란별수선화의 이름이랍니다. 하이포시스 오리어. 꽃말은 빛을 찾다. 아명을 지어주신 아버지는 이걸 원하셨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이름의 힘대로 빛을 찾아가고 있답니다. 제 꿈 끝에 있는 빛을요. 그 빛에,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만약 빛을 찾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오리어가 아니라, 아스포델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란 건 확실하군요. 제 꿈엔 언제쯤 도달할 수 있을까요? 길고도 짧은 삶 안에 할 수 있는 일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알레프. 언젠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전할 수 있기를. 그 때가 되면 우리는 편지를 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지 못했던 많은 말들을 나눌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몰랐던 나의 이야기, 내가 몰랐던 당신의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테죠. 그리고 알레프가 생각한 나의 새 이름도 들어보고 싶어요. 나중에 또 전하지 못할 편지를 쓰겠습니다. 아마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될 거예요. 그리고 저는 편지가 얼마나 쌓이는지 볼 셈입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알레프도, 당신의 말을 빌려, 무탈하고 행복하며, 건강하시길. 많은 친구를 잃어버린 여름에. 작은 오리어, 아스포델 메르시에. (편지 말미에 작은 수선화 그림이 엉성하게 그려져 있다.) |
2014.08.14 자캐커뮤니티 커튼콜 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