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와요?"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보는 발레스 부인의 눈빛은 우아한 암사자 같았다. 도대체 발레스가 뭐가 아쉽고 뭐가 모자라서, 이 도시에선 이미 죽은 자인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어떤 짐작이 갔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지.
"네가 나 대신 헤르타를 좀 잡아줘야겠다."
"......"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지요, 부인은. 내가 홀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입 밖으로 나올 뻔한 그 말을 급히 갈무리하며 자신은 눈치를 살폈다. 발레스 부인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헤르타와 뒤마가 유착관계라는 걸 누구나 다 아는데, 헤르타가 워낙 설치니 뒤마를 잡을 명분이 없어서 말이다. 헤르타부터 무너뜨려야 하는데 나는 귀한 발레스의 패를 여기다 쓰고 싶지 않구나."
그녀의 말은 언뜻 듣기에, 마치 자신이 버리는 패라는 의미처럼 들릴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속내를 충분히 파악할 만큼, 발레스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겉으론 화려하고 당당한 발레스지만,
뒤마의 해- 그러니까, 자신이 세상을 등지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울다하로 떠났던 바로 그 해.
그 해에 이유 모를 전염병 같은 것이 돌았다고 했다.
그게 진짜 전염병이었는지는 이제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건 기정사실이다.
이자벨 발레스 또한 피해자로, 남편인 발레스 전 가주와 차기 가주였던 큰 아들을 동시에 잃었다. 당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현 가주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십여 년이 더 필요했으므로 모든 발레스는 쥐 죽은 듯 살아야만 했었고, 재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뒤마에서도 사람이 죽었지만, 뒤마는 그게 마치 액땜이었다는 것처럼, 그 이후 승승장구를 달렸다. 특히 가세가 크게 기운 발레스의 지분을 제법 많이 삼켰었지.
이 모두, 미련과 집착으로 이슈가르드의 동태를 살피던 때에 알게 된 것들이다. 어쨌든 발레스로서는 어떻게든 재기에 성공한 지금, 고작 작은 것에 패를 쓸 순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거절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내가 네 복수까지 톡톡히 해줄 테니까."
"저는, ...복수하고자 온 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예. 저는... 진상을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복수보다는 제가 악기를 연주할 수 없게 된 진짜 이유를 원합니다. 당시 의사는 원인 불명의 병이라고 했지만, 저는 제가... 독을 먹었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발레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그 의문에 답을 던진다.
"아! 그렇다면 너는 더더욱 거절할 수 없겠구나. 내 하나 말해주마.
나는 내 남편과 내 첫째 아들 필리프 모두, 너와 똑같이 '뒤마의 독' 에 당했다고 보고 있다."
"예? ...부인, 방금, 뭐라고요? 누구, ...누구의 독-"
제 놀란 얼굴을 보고 발레스 부인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그 위로 다른 목소리가 겹친다.
무대 위의 앳된 소년이 그 주인임을 깨닫는 건 조금 늦었다.
- 이 곡을, 제가 제일 좋아하고, 닮고 싶었던 연주자. 말레노이아 두란테에게 바칩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무대 위로 시선을 던진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내 이름?
날, 닮고, 싶었다고?
나는, 잊힌 게 아니었던가?
이제는 어디에도,
없었던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내 연주를 기억하는 저 사람은,
하필이면.
내게, 독약을 먹였던,
그 때, 그 사람의,
......
시야가 하얗게 멀어진다.
그 끝에, 혼란을 달래주듯이, 옛날처럼, 어느 새 부드럽게 제 볼을 쓰다듬는 첫 음이 있다.
순간 멍해진 두란테의 얼굴을 보고, 발레스 부인은 고개를 천천히 무대로 돌렸다. 어두운 객석에 앳된 소년 연주자 홀로 빛나고 있었다. 발레스 부인은 무언가를 짐작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두란테를 보았다.
지금 이 순간, 두란테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건반을 쓰다듬고 숨의 깊이만큼 눌러, 저 앳된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그 음정 하나하나가 그 옛날 그의 연주를 모방하는 것 뿐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천진한 것은, 들려오는 이 음색들이 제 기억 속 환상인 줄 알면서도, 저주처럼 다시 한 번 사랑했던 음악의 소맷자락을 따라 추억을 거슬러 가고 있다.
그래, 아름답겠지. 추억이란 게 다 그런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있다간 잡아먹힐 텐데.
너는 과거를 붙잡을 수 없지만 과거는 널 삼킬 수 있으니까.
게다가, 무대 위 저것이 뭐라고 말했는지 돌이킨다면,
당한 것이 있다면 더더욱 위험한 줄 알아야지.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너는 하나도 모르는구나.
이 어리석고, 순진한 것.
어느덧 음악이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찰싹!
손등 위에서 우레 같은 마찰음이 터진다. 동시에 아득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이 번쩍인 것도 같아 눈을 한 번 깜빡이면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발레스 부인이 부채로 제 손등을 내리쳤음은 그 다음에 알았다.
"부, 부인. 죄송, ...합니다."
잠시 무대를 노려본 부인은 사과할 때가 아니라는 듯, 다시 부채를 펴들고 입을 가리며 그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남들이 보면 귀엣말이라도 하는 시늉일 테지.
"두란테,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말하겠다. 도와줄 테지?"
아까는 잠시 주저하긴 했으나, 은인의 부탁이다.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걸 도와주면... 아까 들은 '뒤마의 독'에 대해 더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부인은 빠르게 덧붙였다.
"헤르타가 얼마 전에 '용의 알'을 '초코보 알'인 척, 고르가뉴 목장에서 밀매했다. 고지 드라바니아의 밀매업자를 통해 알아낸 것이니 증좌는 확실하다. 눈들이 많아 아직 저택으로 옮기진 못한듯 해."
용의 알이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에 핏기가 가시는 듯 했다. 용시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용과의 화합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용의 알을 사적으로 취급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 불화의 씨앗이 다시 싹틀 것이 뻔하지 않은가.
문득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쓸모가 있겠다.
제 놀란 얼굴을 보며 부인이 말을 이었다.
"나는 사정상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하니, 네가 익명으로 고발을 좀 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부인, 저도 대외적으로는 울다하에서 온 몸입니다. 제가 했다는 게 들키기라도 하면..."
"외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너에게 손을 못 쓸 것이다. 무역단으로 온 사람이 죽었다? 국가적인 책임으로 번질 수 있으니까, 일을 더 키울 생각은 못할 테지. 게다가 애초에 너는 유령 같은 존재이지 않으냐. 어차피 너는 에밀 로르, 허울 뿐인 이름일진대, 무어가 두려워?"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면, 걸 목숨도 없지 않냐고.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해주었다고.
부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슬픔이 몰아쳐 대답하지 못해 침묵하는 동안 멀리서 음악이 들린다.
어차피 저 아름다운 소리는 제 것이 아니지. 비단 그래서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늙은 암사자 앞에서 얌전히 제 목을 내놓아야 한다는 처지가 이상하게 씁쓸했다.
나는, 우리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그 때 당신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던 걸까요?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당신의 제안을 조심스럽고도 기쁘게 받아들였을 테지요.
자조의 끝에, 알겠노라고.
목련이 질 때처럼 고개를 푹 끄덕인다.
그와 동시에 제 귓가에 산란한 음정들이 쏟아진다.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며 화려하게 펼쳐지는 멜로디는 클라이막스를 향하고 있었다.
멜로디를 등지고 바라본 부인의 붉은 입술은 제 대답에 만족한 듯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순간, 제 귓가에 닿은 그녀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차가웠다.
"......내가 때를 보아 다시 연락하마. 지금 너는 돌아가는 게 좋겠다."
부인은 급기야 제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마치 쫓아내는 듯한 행위였다.
갑작스레 달라진 태도에 당황한 얼굴을 하자 부인은 인상을 썼다.
"당장 떠나거라, 어서."
그제야 알았다. 그녀는 저를 이곳에서 내보내려고 재촉하고 있다. 하긴, 우리는 만난 적이 없어야 할 테니까. 속으로 혼자 납득한 뒤 인사라도 하려고 엉거주춤 자세를 잡으니 그녀가 부채를 휘둘렀다.
"얼른!"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일갈하는 통에 인사도 포기하고서 몸을 돌리고 로브를 다시 뒤집어 쓴다.
직진하고, 오른쪽의 계단으로 내려가서, 그리고...
왔던 길을 정신없이 되돌아가는 자신의 등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린다.
무지개처럼 먼 갈채.
저도 모르게 잠시 뒤를 돌아봤다가, 어쩐지 눈물이 어리는 것 같은 눈을 꼭 감고 다시 앞을 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속이 시끄러웠다.
그 탓일까.
연주회장을 멀리 나서는 작은 발걸음 뒤로, 괘씸한 생각마저 뒤따랐다.
그러면 안 될 거라는 거 알지만.
혹시 당신에게, 말이라도 붙일 수 있다면,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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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시 크로울리와의 갈등으로 대화도 거의 못하던 지경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