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The Churning Mists (Night Theme) - FFXIV
기실 모험가가 되어서 어디든 못 가겠냐마는 언제든 예외는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천국이나 지옥 같은 제법 허황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들도 굳이 비유를 한다면 꼭 못 갈 곳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감히 말하건대 다 잘린 암피프테레의 모가지를 옆에 두고 있자니 지옥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퍽 싫진 않았다. 그게 너무 오래토록 핏내 풍기는 생활을 해서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날이 어두워 마치 꿈결 같기만 해서인지, 아니면 함께 있는 사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방금 몇 마리째인가의 용을 도륙한 용기사를 보던 히비스커스는 회복마법 읊어대던 것을 이제 그만 두어도 된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땅으로 살짝 떨어뜨렸다. 용들이 흘린 피는 구름바다의 마른 땅에 이미 다 스며 들어서 어떻게 보면 포도주를 부은 것 같기도 했다. 쇳내를 소매로 가리던 중 제 옷에 튄 피가 보였다. 몇 번 문질러보았지만 더 번지기만 해서, 닦아내려는 헛된 시도를 포기한 히비스커스는 알레트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창은 더 갈 곳이 없어 보였고, 이상하게도 외로워 보였다. 하여 적당히 거리를 좁혀 그의 차가운 갑주 위에 손을 얹었다. 사룡의 졸개들이 여태도 멀리서 포효하느라 땅이 미미하게 울리고 있었으므로 예민한 용사냥꾼은 쉬이 전세를 풀진 않았다.
"그만 긴장을 풀어요, 나의 투신."
차분하면서도 제 어딘가 불안함이 담긴 목소리를 들은 겐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알레트가 그의 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투구에 박힌 붉은 보석들이 흉흉했다. 다독이듯 다시 한 번 손등을 두드리자 사내는 못내 창을 등 뒤에 걸었다. 그리고 핏내나는 용의 시체들을 툭툭 건드려 한 쪽으로 조각을 밀어내며 그래, 하고 말을 흘렸다. 태연한 척 행동했으나 누가 봐도 그는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성을 찾기 위한 약간의 노력 끝에 곧 다른 말을 꺼내는 걸 보니 그 노력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쉬는 게 좋겠어."
격앙감을 채 내버리지 못한 듯 그의 목소리는 여직 살짝 갈라져 있었다.
"그러게요, 특히 당신이요."
"난 괜찮아."
"일단 따뜻한 불 앞에 앉고 나서 모든 변명을 들어줄게요."
"변명?"
아마 그가 무장을 해제했다면 눈썹 꿈틀거리는 걸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히비스커스는 두 손바닥을 내밀어 농담이었다고 빠르게 해명한 뒤 장작 주우러 다녀오겠다 말을 돌렸다. 알레트는 쉬고 있는 게 좋겠다고 말을 덧붙인 건 물론이었다.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가 다른 마물들을 만나면 몇 차례 전투를 마친 알레트에게 짐을 더 지우는 일이 될 게 뻔했다. 그의 투신은 특히 용을 닮은 마물 앞에서, 창 끝을 다른 곳으로 겨누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으므로 히비스커스는 보란 듯이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툭 놓았다. 주변에는 용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담이 커진 모양인데. 알레트가 숨을 들이키며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건지 히비스커스가 조금 웃었다. 풀이 바스락거리는 단말마와 함께 그의 짐 아래에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풀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장작 주울 거면 같이 가지."
뒤집어 쓴 용의 피 사이에서도 분명하게 시린 얼음 냄새를 풍기던 남자가 투구를 벗으며 그렇게 말했다. 히비스커스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무사히 마른 나무로부터 장작거리를 꺾어온 두 사람은 곧 불을 피웠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불꽃이 그에 따라 흔들렸다. 용과 인간이 공생하던 시절의 유적 일부분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으나 풍향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싸늘했으나 따스한 남서풍이었다. 히비스커스는 나무 타는 냄새가 기분 좋다고 말했고 바람을 등지고 있던 알레트는 그 냄새를 맡기 어려웠으므로 불을 향해 몸을 조금 숙였다. 따스하고 마른, 그리고 어딘가 향긋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히비스커스의 말이 맞았다. 등지고 있는 암피프테레 시체들만큼 싫은 냄새는 분명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특유의 짓궂은 성정 때문에, 자연이 불타고 있는데 기분이 좋다니 백마도사로서 불경한 말 아니냐고 끝내 농담을 했다. 하얀 연인은 그를 살짝 흘겨본 듯 했으나 금세 딱 그만큼 하얀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술 한 잔 하겠어요? 잊힌 기사 주점에서 받아온 건데."
온기로 몸을 적당히 데우고 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히비스커스가 알레트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양념 포도주예요. 알레트는 익숙한 이름을 듣곤 기꺼이 한 손으로 술을 받아들었다. 고단한 전투 후에 마시는 술만큼 괜찮은 것이 또 없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포도주를 입에 머금자 혀가 미약하게 화끈거렸다. 작은 병이어서 금세 다 마실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알레트는 느리게 병을 기울였다. 으레 술은 그렇게 마시는 법이었고, 히비스커스가 술을 홀짝이고 눈썹을 찡그리는 게 재미있어서 구경하느라 늦어진 것도 있었다. 또한 술기운이 기분 좋게 돌아, 몸에 여직 남은 긴장마저 다 풀어내는 것을 오래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병을 내려놓자 뭔가 두툼하고 차가운 것이 손등에 닿았다. 아까 도륙했던 용의 조각 중 하나였다. 알레트는 무심한 얼굴로 잘린 용의 앞발을 집어들었다. 이게 여기까지 굴러 왔네. 히비스커스는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곤 마시던 포도주에 사레가 들려 쿨럭거렸다.
"──그, 거. ...베개로 쓰려는 속셈은 아니죠?"
알레트는 부러 앞발을 흔들거렸다. 히비스커스의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 농담이었는데 진짜예요? 이럴 때 꼭 대답하는 단어가 있었다. 질문을 던진 이도 아마 예상했으리라.
"글쎄."
몇 번째인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하지만 그 익숙한 대답에 히비스커스는 이상하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확인하곤, 정말로 베개로 사용할 전리품처럼 머리맡 어딘가에 놓으려는 시늉을 하던 용기사는 좀 더 멀리 그 시체조각을 던져버렸다. 사실 아무리 벨 게 없대도 하찮은 것을 베고 잘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그런 걸 안 베고도 인간은 다 잘 잠들 수 있다.
흉한 앞발과 이별한 것을 확인한 히비스커스는 한숨을 폭 쉬곤 알레트에게로 좀 더 몸을 붙여왔다. 그러고서는 하는 게, 어린 짐승처럼 가만히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것이다. 알레트도 언젠가 난로 앞에서 어깨를 감쌌던 그날처럼 자연스레 그의 어깨를 감쌌다. 추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인듯 했고, 그게 맞든 아니든 아주 달가운 접촉이었기 때문에 히비스커스는 웃었다. 곧 뒷통수 언저리에 딱딱한 뿔 끝도 닿는다. 잠들 것처럼 알레트가 기대온 탓이었다. 히비스커스는 그에게 슬쩍 머리를 부비고는 더 깊이 머리를 묻었다. 어느새 빈 포도주 병이 발치에서 달각거렸다. 가끔은 바람이 틈새로 들어갔다 나와서 작은 음악이 되기도 했다.
어여쁜 시간이었다. 그래, 어여쁜, 그리고 불티처럼 짧게 타기도 하는 시간. 갑자기 히비스커스는 그 짧음이 서늘한 새벽 같이 느껴졌다. 모든 시간들이 다 그랬지만 특히나 알레트의 일부는 투신이었으므로, 그에게는 더더욱 찰나의 시간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반면 자신은 찰나가 소중한 평범한 인간이다. 좁히기 어려운 간극에 마음이 쓰려와, 히비스커스는 양념 포도주 병을 발끝으로 암담하게 툭툭 쳤다. 이미 지난 여러 가지 풍미가 입안을 뒤늦게 어지럽혔다.
그러자니 불의 열기와는 다른 온기가 몸의 일부를 데웠다가, 멀어졌다가 했다. 이제 체온이 돌아온 알레트의 손이 저를 몇 번 도닥인 것이었다. 그 온기를 타고 걱정이 몸속에서 끓어올랐으나 히비스커스는 겨우 참아냈다. 불안은 밖으로 뱉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으며 그 걱정을 하는 시간에 별을 읽어 운명을 바꾸는 쪽이 더 좋았다. 히비스커스는 눈을 들었다. 드라바니아의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다. 남부 다날란에서 봤던 것만큼 예쁘다고 애써 말을 흘리자 알레트가 음, 하고 짧은 입소리를 내었다. 또 별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오늘은 별을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말하지 않은 불안들이 있었으므로 찰나를 아끼는 편이 더 좋으리라. 별은, 아주 나중에도 유영할 수 있으므로.
히비스커스는 고개를 살짝 틀어 알레트의 턱 끝에 입맞췄다. 그리고 늘 이때쯤에 몇 번이고 건네곤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자장가 불러줄까요? 나의 푸른 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