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2화: Sujet
고지 드라바니아의 바람은 언제나 모래가 섞여 서걱거렸다. 바람을 마시지 않으려고 머플러를 끌어올리며 풀이 드문 황야를 걷다보면 발자국이 남곤 했는데, 또 뒤돌아보면 물감이 바랜 그림처럼 어느새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태로다가 풍화되고 있기도 했다. 시신 같았다.

시라 티아는 황야를 걸으며 저 혼자 품속에서 소리없이 절그럭대는 자신의 목걸이를 옷 위로 쥐었다. 이제와선 짝을 잃은 목걸이었다.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죽은 형에 대한 그리움보다 아주 근원적인 물음을 더 생각하곤 했다. 형은 이단자인 것을 왜 나한테 숨겼을까? 형이 용의 피를 먹고 에이비스가 되었다면 그때부터 내가 알던 형이 맞을까? 아니면 그냥 마물이지 않을까? 한참 동안 생각했지만 언제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라아는 머플러를 내리고 숨을 토해냈다. 용들의 탑이 가까웠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용들은 라아가 근처의 성벽을 올라도 별 말 하지 않았다. 지금의 라아에게는 가장 높은 탑의 폐허에 오래 머물러도 쫓아내지 않는, 그런 무심함이 필요했기에 되려 고맙기만 했다. 가끔 싸한 내음이 바람결에 실려오긴 하나 혼자 긴 생각을 할 조용한 곳으로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오늘의 주제는 그리바 티아다.

제게 있어서는 복잡한 이름이었다. 무너진 성벽 위로 올라서며 라아는 바람을 삼켰다. 여기, 이 땅이었다. 비틀린 운명이 시작된 곳. 그리바 티아가 에이비스를 죽이고, 에이비스에게서 떨어진 장신구와 똑같은 것을 가진 시라 티아를 마주한 곳이, 형이 에이비스에게 먹혔다고 착각한 뒤 정신을 잃은 라아를 데려와 돌보기 시작한 곳이, 그러다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인 그 에이비스가 너의 형이었노라고, 그 모든 것을 고백하고 라아의 손에 죽고자 했던 곳이 모두 여기였다. 리바가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배신감과 복수심이 샘솟아, 내 앞에서 괴로워 하면서 살아보라고 했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애초에 품을 필요가 없었던 증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곤 했다. 에이비스로 변했던 형이 여전히 자신의 형이 맞다면 리바를 증오해도 괜찮을런지 모른다. 그 답을 얻기 위해 드라바니아를 아무렇게나 헤매이고 다니는 에이비스 앞에 홀로 서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물은 저를 인식하자마자 지나치게 가지런한 이를 세운 채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에이비스의 입 속으로 총알을 박아넣으며, 시라 티아는 참담한 생각을 했다. 이 에이비스 또한 언젠가 자신의 형처럼 인간이었겠지. 그 때조차 시라 티아는 그리바 티아를 생각했다. 아, 너 또한, 이랬겠지. 아무 것도 모르고.

리바는 너무 착하고, 너무 미련한 사람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저지른 일에 대해 여태 속죄하고 있는, 터무니없이 안타까운 사람. 자길 버리고 떠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죄를 영원히 고백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바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처럼 진심으로 속죄했다. 자신에게 던지는 모든 비수를 모조리 받아들이며 그 자리에 기꺼이 서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형을 잃고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따뜻한 일상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기도 했다.

시라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리바를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를 계속 붙들어놓고 싶어졌다. 따뜻한 선의에 계속 기대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를 계속 옆에 붙잡아 두려면, 리바에게서 여행하고 싶은 욕망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괴로울 때 울 수 있는 자유를 빼앗으며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계속 그를 붙들기 위해 악역을 자처하자고, 진심으로 속죄하고 있는 인간의 죄책감을 계속 끄집어 내자고 생각했다. 엉터리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인 인간 그게 시라 티아였다. 그런 사람이, 그토록 다정한 사람을 옭아매도 괜찮은가?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인간을 붙잡으면 안 된다. 솔직히 이미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형의 죽음은 슬프지만 운명의 장난이기에, 그리바의 삶을 송두리째 휘어잡을 권리 따위 시라에겐 없었다. 그는 원할 때 떠날 수 있어야 했고, 기쁠 때 진심으로 웃을 수 있어야 했다. 괴로울 때 울 자격이 없다면서 참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바 티아는 너무 오랫동안, 그의 삶 없이 시라 티아 옆에 서 있었다. 그걸 떠올리자 눈물이 났다.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 탓에 알았다. 소매를 들어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라아는 입술을 악물었다. 

자꾸만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겨우겨우 삼키며, 라아는 자신의 증오가 그리바 티아의 진심 앞에서 녹아가고 있으며, 녹은 증오 위에는 다른 마음이 덧씌워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만 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마음은 엉망진창으로 흩어지고 있었지만, 무너진 잔해는 또 다른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분명한 건, 그 그림의 가운데에는 그가 있다.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리바 티아. 라아는 그의, 난처하게나마 웃는 모습이 좋았다. 그가 더 편안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자신이 그를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으리라. 옆에서 쭉 괴로워 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그러니까 그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를 용서한다고, 이 지독한 사슬에서 풀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제 곁을 떠나버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얼굴을 덮은 손과 웅크린 어깨가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독한 절망감이 라아를 삼키고 있었다. 그리바 티아가 행복하려면, 시라 티아가 그의 옆에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될 것이다.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리바에게 이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이만하면 됐다.

시라 티아는 마침내 결심했다. 죄책감 속에서 비틀거리는 그리바 티아를 놓아주자. 그러면 그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마음을 정하자 눈물이 쏟아졌다. 라아는 결국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목놓아 토했다. 





시라 티아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집에 돌아온 건 하늘에 떠돌던 붉은 기가 죽고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한 때였다. 이딜샤이어에 도착하자 슬슬 머리 끝이 송연해지고 몸에 오한이 들었다.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라아는 잠시 문앞에서 머뭇거렸다. 만지지 않아도 눈가가 발갛게 부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을을 한 바퀴 더 돌면 눈의 붉은 기가 좀 빠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먹은 이상 지체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이미 드라바니아를 걸어오는 동안 또 변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었다. 라아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잡아당겼다. 기름칠을 잘 하지 않은 탓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입을 벌렸다. 틈새로 익숙한 얼굴이 멀리서부터 인사했다. 

"왔어?"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꽤나 갈라져 있었다. 라아는 문 안으로 들어서며 막힌 기침을 했다. 리바는 눈썹을 조금 늘어뜨리며 익숙하게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가져와 건넸다. 라아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들었다. 마시기 좋은 온도였다. 말하기도 좋은 타이밍이었다. 라아는 잔을 건넨 다음 다시 알 수 없는 기계를 조립하러 가는 리바의 등을 보다가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가 시작 신호가 되었다.

"...있잖아, 할 말이 있어."
"응, 뭔데?"

리바가 스패너를 들어올리다 말고 다시 라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호박 같은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라아는 그가 자신의 얼굴에서 붉은 기를 찾아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갑작스러운 말이고, 인정하는 게 너무 늦었지만, 잘 들어."

리바는 스패너를 아예 내려놓았다. 오롯이 저에게 집중하는 리바의 모습을 보며 라아는 긴 한숨을 토했다. 그 짧은 찰나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져서, 라아는 잠시 말을 잊을 뻔 했다. 그러나 고른 말을 내뱉지 않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라아는 숨의 끝에, 하고팠던 말을 똑바로 전했다.

"그건 사고였어."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그리바 티아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라아는 애써 그 모든 것을 외면하며, 그가 한 마디라도 꺼내기 전에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널 용서할게. 너는 더 이상 죄책감에 매일 필요 없어."

너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 곁에는 내가 없겠지. 그 사실이 숨 막힐듯이 괴로웠다. 마비된 듯 머뭇거리는 혀끝에서는 계속 자기방어라도 하듯 결심과는 다른 말이 맴돌았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너를 붙들고 싶어, 그리바 티아. 그러나 결국 시라 티아가 꺼낸 말은,

"그리고 나는 이제 너의 행복을 원해, 그리바 티아."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