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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Villa memoria #02
모처럼 조용한 주말 아침에, 시원은 찌뿌둥한 몸을 푼 뒤 방밖으로 나섰다. 벌써 열시여서 늑장 부릴 시간은 없었다. 부재중인 주인 대신 받아놨던 택배를 올바른 이에게 전해줘야 했다. 구석에 잘 모셔두었던 택배를 허리춤에 엉거주춤 끼고 나오니 에바가 1층에 따로 마련한 흡연실에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예의 그 잎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시원은 에바에게 목례를 했다. 에바는 한 모금 빨아먹은 뒤 뒤늦은 인사를 했다.

  “조용한 아침이에요, 킴. 오늘은 잘 잤을 것 같네요.”

  그러고 나서 에바는 시원이 묻거나 말거나 302호 여자가 새벽부터 나가서 아직도 안 돌아왔다고 덧붙였다. 그 이야기에 간밤에 잠을 잘 잔 이유를 납득하면서 시원은 우스갯소리를 했다.

  “전 괜찮아요, 귀마개 쓰거든요.”

  웃는 에바의 입새로 흐린 담배연기가 퍼져나갔다. 시원은 그걸 보다가 문득 끼고 있던 택배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저, 혹시 401호 남자는 집에 있습니까? 왠지 마담이라면 아실 거 같아서….”

  ‘라이오넬 오코널’이라 적힌 수취인 이름이 유독 낯설다. 시원은 401호 남자의 이름을 그제야 처음 봤다는 걸 깨달았다. 에바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시원을 보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일 나간 뒤로 안 들어왔어요. 202호 여자도 일찍부터 어디 갔는지 안 보이네요.”

  시원은 볼을 긁적였다.

  “모두 나가서 안 들어오네요.”

  그 말을 들은 에바는 유독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우리 모두 언젠간 그렇게 되기 마련이죠.”

  애매모호한데다 제법 이상한 대답이었지만, 시원은 더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뭔가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이 계속 그를 찔러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옆에 놓아둔 간이 의자에 앉아 택배를 무릎에 올리고 에바가 잎담배를 다 태우는 걸 보고 있었다. 에바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입을 쩝쩝거리더니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킴, 그러고 보니 301호 말이에요.”

  시원은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에바가 자신에게 맡겼던 열쇠꾸러미를 떠올렸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한 마스터 키였다. 그 중에 분명히 301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302호 여자가 오기 전에, 오늘 대충이라도 청소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이 주 동안 그 빈 집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 사실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시원은 어차피 오늘 전체적으로 복도청소를 해야 했으니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에바는 담배를 버리고 나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턱짓했다. 얼른 청소하라는 뜻임을 안 시원은 택배를 도로 방에 넣어놓은 뒤 청소도구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짤랑거리는 열쇠꾸러미를 허리에 매단 채였다.

  3층 복도는 조용했다. 302호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시원은 그 미친 여자가 문을 닫고 나갈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며 맞은편의 301호로 향했다. 닫힌 문고리에 열쇠를 넣고 돌렸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이상하게 여긴 시원은 몇 번 더 돌려보다가 열쇠를 빼고 문고리만 잡아 돌렸다. 제법 오래 기름칠이 되지 않은 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애초에 잠겨 있지 않은 문이었던 것이다. 왜 문을 잠그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며 시원은 301호 안으로 들어선 뒤 안쪽에서 문을 잠갔다. 그러나 청소를 시작하기 전, 시원은 301호에 있는 커다랗고 검은 실루엣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였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이대로 청소를 해도 괜찮은 것인가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시원은 어물대다가 할 일도 다 못 하게 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일단 바닥부터 쓸기 시작했다. 301호 청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피아노 주변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301호 및 전체적인 복도청소를 마친 뒤 시원은 에바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에바가 기왕 먹을 거면 적적한 늙은이와 같이 먹자고 했던 탓이었다. 그녀가 리조또 위에 치즈를 뿌렸다. 시원은 느끼한 것이 당기지 않아 치즈를 뿌리지 말아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너무 늦었다는 걸 알고 대신 301호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에바는 대수롭지 않게 원래 그렇다고, 말해주는 걸 잊었는데 거긴 늘 열어놓고 있다고 대답하며 리조또를 시원의 앞에 놔주었다. 시원은 토마토 페이스트 냄새가 코를 찌르는 리조또를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었다. 치즈를 보니 김치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도 억지로 입에 욱여넣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먹고 나서 시원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요, 마담. 301호에…… 피아노가 있던데요.”
  “네, 있지요. 그게 왜요?”
  “그, 왜 그게 거기 있나 하고요…… 보통은 빈 집에 피아노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다는 그런 일 잘 없잖아요.”
  “302호 여자 거예요. 정확히는 그 집 딸 것이었죠.”
  “딸이요?”

  에바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402호 남자였다. 리조또를 먹던 에바가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402호 남자는 에바를 보고 그 관리인인지 경비원인지 하는 남자가 혹시 여기 있냐고 물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은 시원은 입에 묻은 토마토 페이스트를 냅킨으로 닦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402호 남자는 시원에게 까칠한 말씨로 당신이 증인 겸 해서 좀 와줘야겠다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증인까지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증인이라면 에바여도 좋았을 텐데 자신을 굳이 데려가는 이유를 고민하며 남자를 따라 올라갔던 시원은 쭈뼛거리며 서 있는 마른 다락방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는 불안한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402호 남자는 소녀의 심정은 헤아리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이 여자아이가 위에서 그 빌어먹을 발레연습인지 뭔지를 한다고 간헐적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쉴 수가 없다고 말하며 사실 여부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소녀는 그게 사실이고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남자는 그것이면 됐을 텐데, 앞으로 다락방에서 연습하지 않겠다고 하라며 소녀를 종용했다. 대체 발레연습의 어디가 그렇게 큰 소리가 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시원은 그것을 지적하려고 했다가 소녀가 울먹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에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가 겨우 말할 수 있었던 건 ‘증인이라는 게 이거 말씀하시는 것이었어요?’ 뿐으로, 원하는 대답을 얻은 402호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그렇다고 말했다.

  “이렇게라도 해놔야 다음부터 자기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내빼질 않겠지.”

  그리고 402호 남자는 제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302호 여자 대신 이 아이에게다 화풀이 하는 거잖아요. 시원은 그렇게 말하려던 걸 겨우 참고 402호 남자의 등을 노려보았다. 남자가 증인으로 에바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갔다. 그녀라면 이 상황을 부당하다고 반격했을 터다. 402호의 문이 닫히자마자 시원은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우울한 얼굴에 그늘이 깊었다. 얼굴을 조금 내리면 그녀의 낡아빠진 토슈즈로 감싸인 발에 시선이 가닿았다. 토슈즈엔 몇 번이고 덧대고 꿰맨 흔적이 선명했다. 시원은 문득 301호 생각이 났다. 301호는 늘 열려있지 않은가.

  “저기, 그…… 울지 말아요. 제가 적당한 곳을 하나 알아요.”

  적당한 곳이라는 말에 소녀의 촉촉한 눈동자가 시원을 향했다. 시원은 멋쩍은 얼굴로 이래도 되는진 모르겠는데요, 하고 입을 뗐다.

  “301호는 늘 열려 있거든요. 302호 여자가 없을 때 거기 가서 추시는 건 어때요?”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을 보아 그의 제안은 제법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시원은 내심 뿌듯해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소녀는 아마 당장 그곳에서 연습하진 못했을 터였다. 오후가 되자마자 302호 여자가 귀신같이 나타나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원은 그녀에게 차선책을 제안해준 것만으로도 매우 괜찮은 일이라 여겼다.

  그 날 저녁, 잠들기 직전에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시원은 누워 있다말고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어땠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두를 떼기 전에 시원은 어머니가 전화기 너머에서 연신 기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원이 병원은 가시었냐고 물으면 아직 안 갔다는 야속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는 게 바빠 영 병원에 갈 짬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시원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고자 했던 첫 생각을 싹 까먹고, 내일은 병원을 꼭 가셔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시원은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이번에도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꼭 하리라 마음먹었더라도, 못 했을 것이란 걸 그는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에게 여전히 무거웠다.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원은 마른세수를 했다. 꼭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일이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변명 같은 말이 맴맴 돌다가 마음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