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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Villa memoria #01
시원은 스물 중반의 청년으로, 밝은 얼굴과 아무런 그늘도 없어 보이는 웃음이 인상적인 이였다. 그는 그런 것들로 하여금, 외국 땅에 유학을 와서조차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줄 알았으나 기실 마음속엔 고향에 두고 온 홀어머니를 생각하는 탓에 늘 한 자락 그리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집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국제전화비가 만만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는 하지 못했다. 서로가 암묵적으로 정한 시간은 십분 남짓이 다였다.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으나 늘 시간은 짧았고 입속에서 빚어지는 말들은 그저 투박하기만 했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 단 한 마디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에도 잘 지내고 계시느냐, 학교는 잠깐 휴학하기로 했다, 저는 잘 지내니 건강하게 몸 관리 잘 하시라는 그런 말들이 다였다. 시원은 끝내 말하지 못하는 그것이 늘 아쉬웠다. 다음에는 꼭 말해야지, 다음에는 꼭.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나도 무거웠던 탓에 입 밖으로는 차마 나오지 못했다.
 
  그는 휴학한 뒤에 시내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락방이 있는 4층짜리 건물 1층에 딸린 작은 방을 구했다. 관리실이라 불리는 그의 방은 그의 상체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쇠격자 창문이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작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 켜면 소리가 시끄러운 전기난로, 서랍과 냉장고 하나가 들어가고 나면 꽉 차는 크기의 방이었다. 조금 불편할 법도 하였지만 그는 그 방에 만족했다. 게다가 그냥 방만 구한 것이 아닌 경비로 고용된 것이어서, 일을 제대로 한다는 가정 하에 한 달에 한 번 적지만 일정량의 돈이 제공된다. 어떻게 만족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시원은 마늘과 후추내음이 팍팍 풍기는 오일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에바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에바는 이 아파트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나이는 일흔 근방이라 했던 것 같았으나 시원이 보기엔 여든이 훨씬 넘어보였다. 언젠가 서양인들이 나이에 비해 더 늙어 보일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는데 에바가 딱 그 짝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젊었을 적부터 타지로 와서 고생을 많이 했던 탓이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이 주 전이다. 시원이 이 작은 건물의 경비로 거의 반쯤 아르바이트의 느낌으로 고용된 것도 바로 그 때 즈음이었다. 사실 이 주 전의 시원은 에바가 자신을 고용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자신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돈이 궁한 휴학생인데다가, 피부가 흰 사람들 중 몇몇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할 수도 있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물론 꼭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경비로서는 자신보다 훨씬 튼튼하고 활동적인 사람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도 하다. 그것이 시원으로 하여금 살 집이 생겼다는 것에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에바에게 자신을 왜 고용했냐고 조심스럽게 질문하게 한 이유였다. 그의 질문에 에바는 잎담배를 뻑뻑 피면서, 어차피 때 되면 다 떠나게 되어있는데 기왕 그럴 거,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않겠냐는 말로 일관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불이 담배의 3분의 1을 살라먹었을 적에 느리게 덧붙였다. 여기서 일하고 싶지 않은 거면 빨리 말하세요. 시원은 아니라고 황급히 대꾸했고, 에바는 그를 자르지 않았다. 물론 그랬으니 그가 무사히 경비 일을 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에바는 성격이 조금 모나 보이긴 해도 실상은 좋은 여자였다. 시원이 에바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녀가 자신을 시원이라는 이름 대신 킴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이유에선지 혼자 사는 여인이라는 점, 그리고 제법 요리를 잘해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들이었다. 어쨌거나 시원은 에바가 열흘하고도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거의 매일 안부를 묻는 것으로부터 그녀가 퍽 냉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주로 간밤엔 잠을 잘 잤느냐 같은 것들이었는데 시원은 그녀가 그렇게 물을 때마다 잠을 잘 못 자는 날이 있었다 할지라도 잘 잤다고 대답해주었다. 늙은 여인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정말 잘 잤다고 시원이 역설하면 마지못해 돌아가는 식이었다. 시원은 왜 그렇게 그녀가 자신의 수면시간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302호 여자 때문이었다. 시원은 에바가 자신을 고용했을 당시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좀 미친 사람이 사는데도 괜찮습니까?’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아서 웃고 넘겼으나 시원은 근 이 주간 일하는 동안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절절하게 실감해야만 했다. 302호 여자는 검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치 유령처럼 음산하게 뭐라 웅얼거리며 주로 방에 처박혀서 울거나, 3층 복도나 계단 혹은 바깥을 배회해대기 일쑤였다. 시원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동양인이란 걸 알았지만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녀의 광기를 이해하게끔 만들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에 익숙해진 에바는 그녀를 모르는 척 해주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락방에 사는 소녀는 갑자기 사각지대에서 나타난 여자 때문에 너무 놀라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으며, 왼팔 대신 의수를 사용하는 401호의 멋쟁이 남자는 그녀에게 팔을 뺏길 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불편하다 말한 적은 없었으나 그들과는 달리 대놓고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도 있었다. 402호 남자는 그 미친 여자가 잊을 만하면 시끄럽게 군다고 화를 냈고 202호에 사는 여자도 밤마다 언제 그 여자가 문을 두드리고 다닐지 몰라 무서워서 불면증이 도진다고 말했다. 사실 시원은 202호 여자와 402호 남자의 불만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문제였던 데다 시원도 비슷한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에바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사흘 전에 302호 여자가 우우 울며 계단을 왕복하다가 그의 방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때 아닌 소음에 잠에서 깨어난 시원은 문을 열까 하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여자의 웅얼대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더랬다.
 
  이 주 동안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은 이사를 가지 않는 걸까. 시원이 거의 다 비워진 오일 파스타 그릇 위에 포크를 내려놓자 덜그럭거리는 큰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그가 휴지로 입을 대충 닦는 동안, 뭔가 다들 사정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미쳤다. 자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조건에 이런 방을 주는 일은 때려치우기도 쉽지 않다. 그 날 이후로 조금만 더 참자고 생각하며 차선책으로 귀마개를 사용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속이 다른 의미로 느글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속이 뒤집히자 무시무시하고도 이기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냥 그 여자가 없어지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