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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제목 미정


  선요가 그 선택을 했던 것은 다섯살 때였다. 더 정확히는 집앞을 지나가던 노파가 물을 한 바가지 얻어먹더니 답례랍시고 이 집 고명딸 선예가 일찍 죽을 것이라고 말한 뒤부터였다. 딸이 일찍 죽을 상이라는 소리를 들은 정실 교씨는 노파를 괘씸하다는 이유로 무릎 꿇렸으나 노파는 이어 이 집 둘째아들을 평생 딸로 기른다면 운수가 둘째아들에게로 옮겨가 막내딸이 천수를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아들은 딸로 기르더라도 본디 사내이니 음기 가득한 운수가 해를 끼치진 못할 터라 말이다. 교씨 뿐만 아니라 첩실 화씨도 처음에는 미친 소리라며 믿지 않았으나 해가 바뀌었을 때 영문 모를 병으로 선예가 앓아눕고 몇 천금을 썼음에도 차도가 없자 그제야 노파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였고, 선요는 그렇게 여자아이가 되었다.

  하루 아침에 여자아이가 되는 일은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혀버린 것이다. 익숙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도련님이라 부르던 하녀가 저를 아가씨라 부르기 시작하고, 어리숙한 시종이 실수로 도련님이라고 불렀다치면 청지기가 실수한 시종의 뺨을 후려갈기곤 하는 나날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배우기로 했던 검을 내려놓고 대신 거문고의 술대를 잡았다. 말씨 또한 곱게 다듬어야 했다. 다행히도 그건 원래도 부드러운 말씨를 쓰곤 했으므로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어 방에는 경대가 들어왔고 비녀와 온갖 장신구, 여인들이 입을 법한 비단옷들이 들어왔다. 그래도 꾸준히 읽어오던 책들은 계속 읽을 수 있었고 시서화를 그리는 데엔 문제가 없어서 아주 약간 안심이었다. 게다가 선요는 제가 이리 갑작스레 불편해졌어도, 선예가 의식을 되찾기 시작하고 미음 대신 전복죽을 삼킬 수 있게 되는 것이 더 좋았다. 선예가 더 커서 좋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면 정말 평생 여인으로 살아도 세상이 원망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딱 삼년이 지나자 선예는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어렸지만 역시 명석했던 선예는 사정을 듣고 둘째 오라비였던 선요에게 깊게 감사하면서, 오라비와 언니 모두가 생긴 것을 좋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장남인 선오가 좌장군의 둘째딸에게 장가를 든 또 그 몇 년 후에, 선예는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던 어느 진사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기실 아비와 어미는 정략결혼을 시키려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몸이 오래 아팠던 사랑하는 고명딸을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아마 이 집안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정략결혼이라니. 선요는 방에 들어와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은 통에 머리에 꽂은 비녀가 크게 흔들려 비뚤어졌다. 제가 아무리 여인으로 길러졌다지만 몸은 사내였다. 그런데 '여인으로서 시집을 가줘야겠다.' 라니? 몇 번이고 곱씹어봐도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간다 쳐. 그럼 신랑 될 사람은 무슨 죄야. 선요는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착잡한 것은, 선택지가 없단 것이었다. 시부모 되실 분들께 네가 실은 사내임을 알려드렸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낙하신 것이다. 허니 뜻을 거스를 생각은 마라.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쟁쟁했다. 선요는 비뚤어진 비녀를 끌러내렸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경대를 열자 고운 얼굴이 들어왔다. 사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얼굴이 거기 있었다. 선요는 분이 곱게 얹어진 제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경대를 닫았다. 체념 같은 손짓이었다. 유가는 대대로 무인이 많이 배출된 가문이었으나 지금에 와선 과거의 권세와 모아둔 돈에 기대어 지낼 뿐 정계에서 입지가 낮았다. 그에 비해 윤가는 상공까지 지낸 가문이라 여태 정계에서 무시 못할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딸의 오랜 병으로 인하여 가세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아마 정략결혼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병세도 어린 선예 때처럼 만만찮은 모양이었다. 그 딸이 혹시라도 죽는다면, 아마 내쳐질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선요는 픽 웃었다. 어차피 시집을 들더라도, 어디 속할 수가 없는 몸이었다.

  길일은 가을이었고, 하늘이 높았으나 조금 쌀쌀했다. 신랑이 될 사내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리고, 성격이 불같다는 모양이었다. 제가 남자인 것은 조금 뒤늦게 알았다는 듯 했다. 결국 나랑 혼인을 하신다니 용케도 승낙하셨어요. 그 분께서는 화가 많이 나셨을까? 늙은 여종은 선요를 단장시키다 말고 대답했다. 미리 살필 적에는 그런 듯 했습니다. 그녀는 유가의 유모였고 오랫동안 정실을 모시던 여자였는데 '시집'을 가서도 실수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교씨가 붙인 이였다. 하여 선요는 그녀가 더 물어도 말을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선요는 머리를 올리는 손길에 몸을 내맡기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혼례를 무사히 올리고, 신방에 들면, 신랑에게 이야기를 올려야지. 미안하다고. 그대의 신부가 사내라서, 정말 미안하다고. 제몸으론 윤가에는 대를 이을 아이를 안겨줄 수도 없을 것이고, 경거망동하였다간 신랑을 비롯하여 시댁에 많은 모욕을 주게 될 것이었다. 차라리 여자아이로 태어났다면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여종이 고운 천으로 선요의 눈가를 꾹 눌렀다. 울지 마십시오, 아가씨. 분칠이 지워집니다. 선요는 그제야 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는 걸 알았다. 미안해요. 좋은 날인데. 그쵸? 좋은 날이어야 하는데.

  혼례는 무사히 치러졌고, 날이 저물자 형식적으로나마 한 방에 두 사람이 남았다. 이 집에서 시부모와 신랑을 제외하곤 아무도 제가 사내라는 것을 모르니 연극을 해야 했다. 신랑은 싸늘한 바람을 몰고 조금 늦게 들어왔다. 함자부터가 연이라고 하였지. 연緣일지, 또는 연捐일지 알 수 없는 신랑이었다. 연에게서는 담배라도 벌써 배운 모양인지 쌔한 냄새가 났다. 담배의 양이나 곰방대의 기능에 별 문제가 없는지 살펴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요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신랑은 당연히 제 옷고름을 풀어내지도 않을 거고, 한 이불을 쓰지도 않을 것이었지만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가령 신랑이 고개를 들게 하기 전에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류의, 그런 지킬 것. 그래, 윤리나 도덕, 규칙과 예범들. 지키는 것이 조금 우스꽝스럽다. 자신은 애초부터 그런 것이 우습다는 듯 체현된 존재다. 여장을 하고 살아가면서 종내엔 시집까지 온 사내. 제 처지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지라 한참을 얌전히 있었다. 그러다 어두운 불 아래에서 흘끔 본 신랑은 생각보다 앳된 듯 했다. 다만 눈매를 비롯하여 외모는 날카로운 이였다. 사납고, 자존심 강하고, 더 솔직하자면 범 같이 우아한 기품보단 이리의 난폭함을 닮은 자. 사내의 턱선을 눈으로 훑다 선요의 입에서 절로 말이 툭 떨어졌다. 미안해요. 연이 눈살을 찌푸린 것 같았다. 선요는 눈을 들지 못한 채 재차 속삭였다. 그대의 신부가, 제가, 사내라서... 미안해요. 그대에게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을 거예요. 허니 후에 좋은 인연이 있다면 첩을 들이세요. 신부는 바닥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속으로 덧붙였다. 그대는 본디 나와 연이 아닐진대 하늘이 무심하여 나의 연이 되었군요. 애통할지고. 선예가 다 커서 시집을 가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평생 여인으로 살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은 이제 거짓말이었다. 동생은 소중했고 그 마음에 변함은 없었지만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기이한 신부를 마지못해 맞이한 이후로는 잘 덖은 작설차가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에 썩 익지 않아 좀 낯서나 분명히 고급진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뒤에 연은 안쪽 방을 돌아보았다. 작설차는 싹부터 제대로 관리하고 기후부터 시작해 차를 덖을 때까지 심혈을 기울이는 통에 궁에도 진상되는 차였던지라 예전에는, 그러니까 연이 장가를 들기 전에는 일년에 두어 번 먹으면 많이 먹는 것이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감흥 없는 눈이 납작한 찻잔 너머를 흐리게 바라보았다가 눈꺼풀 아래에서 암전했다.

  작설차를 내내 먹을 수 있다는 것보다, 제가 사내를 신부로 맞이하게 된 일이 더 해괴하다. 딱히 여인을 신부로 맞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런 건 연에게는 솔직히 말해 '쓸데없는' 일이라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혼인을 해서 대를 잇는다고. 물론 가문을 생각하면 마땅한 일이지만, 자신은 그럴 의무를 그리 느끼진 못 했다. 패륜적 생각이나, 저는 애초에 이 집 아들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조카뻘 되는 아이였는데, 누이를 낳고 아이를 더는 낳을 수 없게 된 어머니가 일찍 병이 든 숙부로부터 저를 데려온 이후로 이날 이때까지 이 집의 아들로 살게 된 것이었다. 대를 잇고 사직을 세워? 글쎄. 연은 한숨을 푹 쉬고 잔을 다 비웠다. 제 태생을 알게 된 어린 날 이후부터 제가 조금씩 박정해져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이 집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 청아하게 부딪히는 사기잔소리가 이상케도 요란했다. 병약한 누이를 제외하면 정을 둔 자도 없다. 심지어 부모에게 박정하니 말 다 했다. 부모는 명예와 권력이 있는데 왜 빚이 그리도 많았는지. 제 누이 소백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제가 '희생' 당한 셈이지만 박정한 탓에 할 원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짜증은 좀 났다. 종묘사직 어쩌고 하는 것에 일절 관심이 없었음에도 여자가 아닌 남자와 정혼하게 된 건, 해괴하다고 생각할만큼 정말 꿈에도 생각치 못한 일인 탓이었다.
  
  연은 조금 된 일을 회상한다. 신부와의 초야엔 별일이 없었다. 신부가 옷을 벗긴 했지만 그런 의미로 옷을 벗은 것도 제가 옷고름을 풀어내린 것도 아니었다. 남자임을 정말 확인하기 위해 던진 질문에 그 스스로 벗은 것이었다. 그리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도 아닐진대, 처지가 우스웠다. 신부는 그런 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잘 웃었다. 함박웃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우 같은 눈웃음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소백을 닮은 따뜻한 웃음에 가까워서, 분명히 선한 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사는 일이, 놀랍게도 나쁘진 않았다. 애초에 성정이 유한 사람인듯 하여 저와 크게 부딪히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침잠 많은 자신을 반 시진을 넘게 깨워내고, 같이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더위를 쉽게 타는 줄을 어찌 알고 얇은 옷을 준비하여 오늘 같은 날에 입히질 않았나, 출타할 때는 꼬박꼬박 마중을 나왔고 돌아오면 어디에 있다가도 꼭 돌아와 다녀오시었냐고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하루종일 제 눈을 피해 돌아다니다가도 밤엔 저보다 먼저 들어와 방에 온기를 두곤 했다. 한 이불이 아니라 두 이불을 덮고 한 방에서 잠들었지만 잠버릇이 요란치도 않았다. 어머니가 부르면 공손히 따라갔고 하인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가끔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때가 있기도 하였는데, 그런 건 굳이 왜인지 물을 필요 없겠지.
  결론만 말하자면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래, 뭐 많은 부부들이 정 때문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 마지못해 산다는데 저라고 남자란 이유 하나 때문에 그렇게 못할까. 박정한 이이니 더욱 쉬운 일일 터였다. 초야 때 들은 말이 떠오른다. 자신이 사내의 몸이니 첩을 들이라는 말이었다. 첩 들일 생각은 없다고 못박았던 기억이 난다. 선요에게 만족해서가 아니라 신부로 또 하나를 들인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하나를 더 들이면 집안이 복잡해진다. 선요는 애초부터 대를 이을 수 없는 몸이지만 첩은 아닐 것이다. 있어서 복잡한 것보다 없어서 복잡한 게 나았다. 연은 잔에 차를 따랐다. 엷은 옥빛 찻물이 잔에 그윽해졌다. 그것보다 다른 게 거슬렸다. 그 밤에 미안하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던 걸까. 뭐가 그리도 미안했는지. 짐작 가는 연유가 너무 많아서 다 셀 수도 없었다. 내조는 잘 할게요, 연기도 잘 할 수 있어요. 의무로 만들어진 관계에 한참이나 미안해 하던, 아니, 미안해 하는 사람.

  뭐, 못 살 것도 아니지. 연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게 지낸지도 벌써 달이 지났다. 하인들은 작은 주인부부가 언제쯤 데면데면한 사이가 좀 좋아질지를 걸고 내기를 했었는데 내기에 참가한 이들 중 대부분이 주인부부에게 별 일이 없어 저들이 내기했단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 정도로 그들의 일상은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문안인사를 드리고, 밥을 먹고, 연이 입궐하면 선요는 배웅을 마친 뒤 집에 남아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시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도 있긴 했다. 그러나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시어머니에겐, 며느리가 사내라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겠지. 선요는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서 일부러 할 말만 짧게 하곤 했다. 얼마 전에선 친정으로부터 물건이 조금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엊그제는 차를 조금 나눔 받은 다음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꽃받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최근 들어 가품이 판친다는 소문이 돌아 걱정이 든 듯 했다. 요행히 제가 약간의 조예가 있었던 탓에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곤 암묵적인 합의 하에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더 나눌 이야기도 적었고, 더 있다가는 대를 잇게 할 수 없는 현실 같은 것을 이야기 해야 할까 두려웠기도 해서, 고마운 일이었다. 여러모로 팔려온 신부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뭐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권력에 팔려왔지.
  또, 아주아주 가끔은 연의 누이 소백을 만났다. 시집을 온 후에는 딱 세 번 보았는데 가장 최근이 어제였다. 처음에는 정말 얼굴만 보고 제 이름만 전하였고 두 번째엔 그녀가 장지문 너머에서 웃으며 아주 뒤늦게 제 이름이 윤 소백이라 말한 뒤에 기침을 하기 전까지 딱 3분만 이야기를 했다. 어제는 그래도 제법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말간 얼굴을 가진 선한 사람이었다. 몸이 어찌나 약한지, 선요는 자신이 왜 재물을 몰고 이 집에 시집 오게 된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소백의 방 쪽을 보고 있으면 기침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날이 차가워지기 시작하자 증세가 악화되는 모양이었다. 조만간 친정으로부터 돈을 더 보내주겠다는 약조를 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돈이 거의 대부분 소백에게 들어가는 듯 했다. 선예 생각이 났다. 선예는 자신 덕에 병상을 털고 일어났으나 소백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가슴 한 켠이 아린듯 했다.

  연은 출타를 했다가도 신시(申時)쯤에는 돌아오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선요가 그를 때맞춰 마중 나갔다. 나리. 대문을 넘자 이제 그리 낯설지도 않은 호칭이 연의 귓전에 와 앉았다. 선요는 연을 두 가지로 불렀다. 하나는 나리, 또 하나는 그대. 바깥에서야 다른 하인들 눈치도 있고 하니 나리라 불렀으나 둘만 남았을 적엔 그대라 했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부부가 아닌 양 불러, 연이 편했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밖인지라, 나리다. 다녀오시었어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길 한 번 주고 걸음을 떼자 들고 온 작은 보따리를 받아들며 선요가 따라 걸었다. 그런 건 종이 해도 될 법한 일인데도 굳이 제가 하겠다 구는 게 이젠 그냥 일상 같았다. 몇 걸음 걷다 말고 선요가 다시 그를 불렀다. 저어, 나리. 곱상한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는 것을 안 연이 고개를 기울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선요는 허락이 떨어진 걸 알고 재차 물었다. 형님 몸이 오래 안 좋으신듯 한데, 얼마나 안 좋으세요? 소백의 이야기에 늘 가시돋힌 듯 날카롭기만 하던 연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글쎄. 당신과 혼인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더 많이 악화됐을 거요. 어릴 적에 몸이 아팠던 선예가 떠오른 선요의 시선이 흐려진다. 그 시선을 흘끔 보다 연은 고개를 돌리고 방으로 들었다. 선요는 따라 들어오지 않으려는 듯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연은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한 마디 했다. 들어와. 대답 대신 비단 사락이는 소리가 나고, 문이 마저 다 닫혔다. 출타를 막 마치셨으니 쉬실 줄 알았어요. 방해되시지 않을까 싶어서…. 목소리가 화난 것처럼 들린 모양이었지만, 굳이 정정해 줄 이유를 찾지 못한 연은 그냥 자리에 앉았다. 선요가 옆에 앉아 작은 화로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목이 마른 줄은 또 어찌 알았는지. 선요는 차를 잘 끓였다. 제가 대충 끓이는 것과는 다른 맛이 났다. 선요가 집게로 잎을 집어 다관에 넣는 걸 보던 연이 말을 이었다.
  "오늘 누이를 뵈었어?"
  선요는 차를 끓이다말고 눈을 깜빡였다.
  "더 정확히는 어제요. 좀 괜찮으셔서 겨우 얼굴을 뵈었어요. 일각 정도 밖에 얘기 못 나누었지만요. 옥구슬 하나 매단 실팔찌를 선물로 드렸답니다. 그대도 잘 아실 테지만 실은 장수하라는 의미니까… 조금, 그, 부적 같은 의미로."
  묻지도 않은 것까지 길게 재잘거리지만, 듣기 싫은 건 아니라 가만히 있다보면 차가 다 끓었다. 잔을 받으며 연이 뒤늦게 대꾸했다.
  "허황된 주술을 믿나본데."
  선요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맹신하지는 않습니다.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믿기지 않았다. 쓸데없어. 말을 흘리자 차에 비친 선요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연은 선요의 물그림자를 목 안으로 삼켰다.
  데면데면한 나날들은 담 위에 늘어진 덩쿨만큼 길었고 또한 물레방아 돌아가듯 같았다. 그 동안 선요는 연의 성격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사납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가끔은 앳된 듯한 구석도 있었다. 부모에게도 가끔 묘한 적개심을 드러낼 때와 같이 말이다. 가령, 첩 이야기를 할 때가 그랬다. 제 생각에 부당한 것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곳에서 다정한 것 같았다. 초야에 들었던, 댁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니잖냐는 말이 오래토록 가슴에 고여있었다. 썩어 들어가는 물이 아니었다. 그 고인 물에는 작은 마음 하나가 뿌리내리고 있어서, 물을 먹고 싹을 틔워갔다. 어떤 꽃을 피울진 알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연의 사나운 얼굴을 마주해도, 겁이 나는 것과는 별개로, 괜찮을 때가 생겼다.
  그리고 삶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입동이 퍽 가까워져서였다. 연은 더운 것만큼 추운 걸 싫어했기에, 갑자기 날이 생각보다 더 쌀쌀해지자 집에 일찍 돌아와 아랫목에 들어앉았다. 선요는 늘 그랬듯 옆에서 차를 끓였다. 그러다 연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장기 둘 줄 압니까?"
  "장기요? 바둑이 아니라?"
  "바둑은 둘 줄 몰라."
  연이 하인을 부르자 근처에 있던 사내 하나가 냉큼 달려왔다. 장기판을 가져오라는 말에 또 그가 금방 사라진다. 선요가 찻잔을 한 쪽으로 치우며 속삭였다.
  "저는 장기를 둘 줄 모릅니다만…… 그대가 가르쳐주시겠어요?"
  "기꺼이."
  말을 좀 떼고 둘 테니까. 돌을 올리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걸 깨달은 선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장기판과 말이 들어왔다. 아주 안 본 것도 아니지만 오랜만이라서 괜히 파란 말을 하나 집어들고 요리조리 살피다보면 연이 당신 같은 걸 집어들었다고 말했다. 적힌 글자를 보니 사다. 제가 선비와 닮았느냐고 물으면 글쎄, 하고 얼버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