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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등령
재가 까만 꽃잎처럼 휘날리던 날이었다.

하늘을 수도 없이 떠다니던 잿가루는 삼십분이 멀다하고 그녀의 기공패 위에 도톰히 내려앉았다. 타냐는 손으로 기공패 위에 얹은 잿가루를 털어냈다. 손가락 끝에 검댕이 묻었다. 그것을 본 타냐는 품에서 천을 꺼내 손가락을 문대어 닦았다. 으스스한 빛깔이었다. 이 검은 빛깔이 대부분 탄연방에서 나온 잿가루로부터 나왔다는 걸 흑음림에서 며칠이라도 지내본 자라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상을 마음 속으로 떠올리는 건, 흑음림에 온통 깔린 빛이 다 그런 빛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바닥에 떨어지는 희뿌연 햇빛을 다 집어삼켜 버리는 어두운 잎을 가진 나무들, 잿가루 묻은 채 어느 한 쪽에 방치된 통나무들, 질척한 땅 위를 스산히 기는 거미들, 그리고 욕망에 눈이 먼 미친 자들. 그네들이 가진 빛들이 다 그러했다.

환야의 숲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에 업고 타냐는 검은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미친 무인의 외침임을, 그리고 어디쯤 그가 있을지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인은 숯 가마터로 돌아가는 중에 그들과 혹 마주치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그녀의 무공은 그들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은 충분히 되었으나, 타냐는 누군가를 해치게 한다는 걸 아직 너무도 두려워 했다. 애초에 그녀의 성정이 여린 탓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함은 앎에도, 누군가를 상처 입혀야 한다는 것, 이어지는 고통의 고백, 살갗 위로 흐르는 생명의 흔적, 그런 것들은 변함 없이 어려웠다.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것도 같아 그녀는 힘있게 눈을 감았다 떴다. 힘든 생각은 잠시 외면하더라도 그리 묻어두는 게 나았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버티지 못할 것을 그녀 스스로가 더 잘 알았던 터다. 타냐는 어느새 멈췄던 발을 다시 떼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던 중 문득 어디선가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등불 같기도 했다.

그제야 타냐는 이 흑음림에 광인, 거미 같은 것들 뿐만이 아니라 모란등령 또한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게, 화장터에서 만난 작은 소녀와 함께 환야의 숲으로 나서지 못했던 연유라는 것도.

화장터에서 만난 아이는 다섯살이나 여섯살을 겨우 넘긴 것 같은 린족 소환사였다. 흉측하고 난폭한 강시나 살이 다 썩어빠진 망자, 커다란 곰 같은 것들이 무서울 법도 한데 울지도 않고 커다란 고양이와 호숙이의 무덤 옆에서 흙장난이나 치고 있을 정도로 천진난만하기도 했다. 타냐는 처음엔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려 했다. 그러나 아이에겐 부모도 연고도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는 인적사항에 관련된 무엇을 물어도 "안녕안녕했다구 했다요" 혹은 "잘 모른다요" 라는 대답만 꾀꼬리 같이 반복했다. 아이가 제대로 아는 것이라곤 티티라는 자기 이름과 나비라는 고양이 이름뿐이었다. 타냐로서는 그런 아이를 위험한 곳에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두고 갈래도 발걸음조차 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리하여 여기는 위험하니 누군가 그대를 돌봐줄 수 있을 녹명촌까지만이라도 함께 가자고, 손을 잡고 흑음림까지 오게는 되었으나, 환야의 숲 안은 무척이나 위험할 뿐더러,

"모란 등령은 아이들을 데려간다지…."

자칫 눈이라도 떼었다가 모란등령에게 그 작은 아이가, 티티가 정신이라도 홀려 어디 멀리 삼도천이라도 건너버릴까 겁이 났던 탓으로, 티티를 숯 가마터의 자경단에게 잠시 맡겨 놓은 상태다.

그러나 애초에 아이를 혼자 너무 오래 두면 아니 될 일이다. 티티는 외로움을 별로 타지 않는 듯했으나 그래도 타냐는 함께 있어주는 것이 더 나으리라 여겼다. 기실 그녀 스스로를 위로코자 하는 일일 수도 있을 터였다. 함께 있어주면 그나마 제 마음이 더 편할 테니까.

숯 가마터에 도착한 타냐는 바로 티티를 찾기 위해 먼저 한 바퀴 휘이 둘러가며, "아가, 티티? 어디 계시어요?" 했다. 티티는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던지라 장작더미나 오두막 뒤쪽까지 꼼꼼히 다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어딜 둘러봐도 티티는 보이지 않았다. 타냐는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집안 또한 살폈으나 아이의 꼬리털 끝도 찾을 수 없었다. 티티가 사라졌다는 걸 안 타냐는 울상이 된 얼굴로 막개를 찾았다. 막개는 방금 막 끼니라도 챙겼는지 쩝쩝거리며 손등으로 입을 닦아내고 있었다.

"소협, 막개 소협…!"
"아아, 자네로군. 헌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리 울상을 다 짓고…."
"소녀가, 소녀가 맡기었던 아이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아이? 아까 저기, 신룡공상 옆에서 고양이랑 모래장난하는 걸 확인하고 밥을 먹으러 다녀왔는데… 없는 겐가?"
"숯 가마터 안을 다 뒤졌으나 보이지가 않아서…."

막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분명히 저기에 있었다고 했다. 타냐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막개가 밥을 먹는 그 짧은 사이 사라진 것이니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타냐는 막개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황급히 몸을 돌려 가마터 밖으로 나섰다. 자갈색 잡초무더기가 발길에 자꾸 채이기도 하고 튀어오른 나뭇가지가 발목을 할퀴기도 했다. 그렇지만 타냐는 그깟 상처라던가 발이 꼬이는 것엔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그 작은 아이의 행방이 더 중요했다. 혹 티티가 잘못 된다면 어쩌나 싶어 타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이를 그리도 걱정할 수 있는 것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났을 그녀의 다정함 뿐만이 아니라 인간된 도리 또한 있기 때문일 터였다. 타냐는 손가락을 들어 눈물을 살그머니 훔쳐냈다.

딸랑.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렸다.

타냐는 고개를 돌렸다.
노랗고 파란 불빛이, 멀고 어두운 숲속에서 꽃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무척 익숙한 그림자가 하나.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티티가 거기 있었다.

타냐는 더 생각하지 않고 그리로 뛰어갔다. 모란등령이 등불을 허공에다 휘두를 때마다 방울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주위를 떠도는 도깨비불들이 그 소리에 맞춰 히히 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타냐는 발이 꼬여 주춤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티티! 이름을 불러도 반응은 없었다. 모란등령의 방울소리에 귀가 홀린 모양이었다. 타냐가 서너 번이나 더 티티를 불렀을 때는 제법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절망적인 것은, 그 동안 티티는 여전히 타냐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반응한 것은 모란등령을 경계하면서 티티를 따라가던 나비 뿐이었다. 타냐는 가까이 다가온 나비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제 오른 손등 위에 얹은 기공패를 확인했다. 죽은 아이들만을 데려가던 예전의 좋은 모란등령이면 또 몰라도, 지금의 모란등령은 탁기에 물들어 산 자들도 데려가려 든다. 내키지는 않지만 결정을 해야했다. 나비가 이를 드러내고 낮게 울었다. 타냐는 손에 든 파란 등을 흔들 때마다 들리는 방울소리가 아득하다고 느끼며, 모란등령에게 불씨를 하나 던졌다.

"캬아아아!"

튀긴 불꽃을 맞자마자 모란등령의 천진한 얼굴이 야차처럼 변했다. 타냐는 저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낸 모란등령에게 가까이 다가가 티티에게 맞지 않게 조심하며 폭열신장을 쏘았다. 용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붉은 불꽃을 뒤집어쓴 모란등령은 괴로워 하며 바닥으로 축 떨어져,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남지 않은 모란등령의 모습을 부질없이 쫓던 타냐는 등 뒤에 서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티티를 돌아보았다. 티티의 시선은 아직 저 먼 그림자만 쫓는 듯 했다. 타냐는 축축한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티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티티, 티티. 몇 번을 흔들었을까. 몸이 흔들리는 것에 그제야 좀 정신이 드는 듯, 시선을 되찾은 티티가 눈을 껌뻑이다 어눌한 발음으로 타냐를 불렀다.

"엉니…?"
"그래요, 티티. 소녀여요. 괜찮으셔요…? 어디 다친 곳은…"
"…어마는…?"

타냐의 말을 끊은 티티가 고개를 기울이며 뜬금 없는 말을 물었다. 타냐는 티티의 말을 따라갈 수 없어서 도로 되물어야만 했다.

"…예?"
"티티 어마랑 아빠는…? 딸랑이가, 티티… 어마아빠한테 델따 준다구… 티티, 어마 만날 수 있다구… 했는데…"

타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을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다. 가끔은 진실을 함구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었다. 그게 지금이라고 타냐는 생각했다. 게다가 티티도 무의식 중으로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타냐는 확인사살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만 티티의 작은 몸을 품에 안고 등을 살살 다독였을 따름이었다. 티티는 그제야 오래 전에 헤어져,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부모를 만나러 가게 해주겠다고 했던 모란등령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란 걸 알았다. 작은 아이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엄마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내려앉았다. 타냐는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꺼뜨리기 위해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다가 티티를 품에 안은 채로 잘 받쳐 안아올렸다. 티티는 품에서 엉엉 울었다. 광야에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지는 것을 들으며 타냐는 그 머리에 입술을 묻고 달래고 어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 목놓아 우는 아이에게 차마 울지 말라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나비 또한 주인이 울기 시작하자 저도 애옹애옹 따라 울었다.

가마터로 돌아가는 동안에 티티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히끅거리는 티티의 등을 토닥이며 타냐는 아이에게 볼을 부볐다. 티티는 이마를 타냐의 이마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삭, 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서진다.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에 잠깐 마음 한 켠 뒤로 넘겨놨던 아픈 기억이 눈을 떴다. 물 맑고 바람 산들거리던 무일봉이 하루아침에 처참하게 변해버린 기억이 천 나풀거리듯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타냐는 티티를 더욱 품에 꼭 안았다.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타냐는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건 티티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티티두… 어마 갖구 시퍼…."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타냐는 티티를 내려다보았다. 옷깃을 꼭 잡은 티티는 고개 한 번 돌리는 일 없이 기댄 채로 가만히 있었다. 타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곤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뾰족한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던 그녀는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티티. …티티만 좋다면, 말예요. 정말로 티티만 좋다면요…"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타냐는 시선을 먼 숲으로 보냈다. 그러나 타냐는 자신이 그걸 기어이 입밖으로 내고야 말 거란 걸 알았다.
자신은 무일봉을 지키지 못했다. 사형들도, 사저도, 사부님도.
그러나 이 작은 아이만은, 반드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누군가를 잃는 슬픔을 알아버린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 더 이상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 그 얼마나 잔혹한 일이던가. 그러니 앞으로 긴긴 세월을 살아갈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힘이 들도록,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절망할 때면 힘이 되고 싶었다.

"소녀를… 티티의 엄마처럼 생각해주지, 않으시겠사와요? 티티의 진짜 엄마를 잊어버리라는 말은 아니여요. 다만… 소녀는, 그대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그냥, 티티한테… 엄마 같은 언니가 되면…"

바람이 불었다. 타냐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먼 숲에 닿았던 시선 사이로 살랑이는 티티의 꼬리가 보이는 것을 보고 눈을 내렸다. 티티는 어느 새 퉁퉁 부은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타냐를 보고 있었다. 타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작게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